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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욱 Oct 21. 2024

아무튼, 도라지 (1)

episode. 1

1     


 지하철역 입구에 도라지를 다듬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몇 번의 칼질에 도라지는 하얀 속살을 내보였다. 붉은 바구니에 벌거벗은 도라지가 쌓이고 있었다. 할머니가 도라지 하나를 다듬는 동안, 쌓인 도라지들보다 많은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인간이나, 도라지나 똑같이 ‘창피한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도라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나라는 아닐 것이다.     


 이번 역은 부스럭부스럭-입니다. 출근 시간의 지하철 안은 꽤 소란스러웠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지하철 안에서 사람들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그들의 한 손은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휴대전화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지하철이 덜컹거리면 그들의 몸은 살짝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그것은 식물 같았다. 지금의 이 모습을 외계인이 보고 있자면 우리들을 식물에 분류해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스럭부스럭- 오른쪽입니다. 지하철 안이 소란스러운 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팔꿈치에 매달려 있는 검은 봉지들 때문이었다. 그들의 팔목에는 열매가 맺히듯이 검은 봉지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지하철이 움직이면 그 과실들은 서로 부대끼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하나의 봉지가 소리를 내면 그의 소리에 공명하듯 다른 봉지들도 소리를 뽐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소리는 지하철 안을 메우기 시작했고, 결국 안내방송의 목소리까지 잡아먹기 시작했다. 지하철 안은 그들에게 장악당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소리가 먹혀버린 지하철 안에서,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고 검은 봉지들이 나가면 다시 검은 봉지들이 그 빈자리를 채워나갔다. 나는 지하철이 멈추었던 횟수를 세어보기로 했다. 둘, 셋, 부스럭부스럭-, 다섯, 부스럭부스럭-, 부스럭부스럭, 여섯, 일곱. 일곱까지 세었을 때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겠다고 마음먹었다. 지하철 내의 울창한 수풀들을 지나고 내가 내린 곳은, 이미 내려야 할 곳에서 두 정거장이나 지난 곳이었다.     


 출근 시간이 삼십 분이나 지난 후에 나는 회사에 도착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칠 층을 눌렀다. 평소에는 듣기 싫었던 소리가 오늘만큼은 괜찮게 느껴졌다. 검은 봉지 속에는 무엇이 들었던 것일까? 칠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 아침의 지하철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사람들이 전부 검은 봉지를 들고 다닌다는 것은 평범하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걱정이었던 것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이과장에게 설명해야 하는 일이었다. 봉투들이 부대끼는 소리 때문에 내릴 곳을 지나쳤다는 이야기가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눈에 선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사무실이 보였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지랄 맞은 이과장의 잔소리가 귓속으로 들려올 것 같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자신의 자리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것은 이과장뿐만이 아니었다. 사무실 안은 이상하게 조용했으며, 탁-탁-거리는 자판 소리만이 들려왔다. 말 많은 김대리도, 눈치 빠른 서대리도, 어수룩해서 사고만 치던 인턴도 그저 묵묵히 일할 뿐이었다. 그들은 모니터와 책상은 번갈아 보기만 하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기계 같았다. 사무실 안에는 어색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 부스럭부스럭- 내 아침을 망쳐놓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시작했다. 소리는 김대리의 책상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의 책상 노트북 옆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분명히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창문도 열려 있지 않았고 선풍기도 켜져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무실이 지하철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왜 봉지가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대리 옆의 검은 봉지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 같았다. 그것은 바람에 일렁이는 풀처럼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에 맞춰서 부스럭부스럭-. 나는 움직이고 있는 얇은 비닐봉지를 쳐다보았다. 부스럭거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무엇인가가 내 쪽을 바라보며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동그란 머리를 내밀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도라지였다.     


 하얀 속살을 드러낸 도라지가 머리를 내밀고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였다. 그 소리가 들리자 다른 이들의 책상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 들이 들려왔다. 이과장의 책상에서도, 인턴의 책상에서도, 서대리의 책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된다면 조금 전 지하철과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 고요한 사무실에 그들의 몸짓이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김대리도, 이과장도 서대리도 인턴들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일하고 있었다.     

 

 그저 피곤한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움직이는 도라지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도라지들의 몸짓은 내가 일어남과 동시에 사라졌다. 나는 곁눈질로 그들은 잠시 쳐다보았다. 그들은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신기한 동물을 본 것처럼 그들의 눈동자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 도라지들의 눈과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무실 안의 직원들이 겉옷을 챙기기 시작하자 그들은 다시 비닐봉지 속으로 들어갔다. 손목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열 두시 삼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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