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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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리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의 발표도 자연스레 내가 하게 되었다. 이과장은 나에게 김대리가 하던 일이니까 김대리가 마침표를 찍어야 하지 않겠나? 아니, 그야 자넨 김대리가 아닌가! 라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아쉽게 됐어 김대리. 아, 자네 말고 저번에 일하던 김대리 말이야. 그 고려당에서 뿌리내렸다던. 그렇게 이과장 비위 맞추고 살아가더니,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구만. 부인하고 자식만 불쌍하지. 서대리는 혀를 차며 말했다. 사람이 바닥에 뿌리를 내린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요? 왜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는 건가요? 김대리. 우리는 모두 이 땅에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될 일인걸.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키보드 자판을 두드렸다.
손등은 틈만 나면 가려워 왔다. 처음에는 점심 메뉴를 정할 때, 잔업 처리를 맡았을 때 가려워 오던 손등이 직원들이 작은 소리로 얘기할 때, 이과장의 눈초리가 느껴질 때 같은 사소한 일에도 반응했다. 결국 내 손등에는 모래 알갱이 같은 딱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게 되었다. 어김없이 청국장을 먹고 온 후에, 서대리는 내 손 등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도 시작했나 보군. 그 손등 말이야. 전의 김대리도 한동안 그 모양이었지.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요즘엔 새 직원들을 뽑아놓아도 이 년을 채 못가니. 취직난이라고는 하지만 회사 입장에서도 답답하단 말이야. 그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감과 동시에 내 코안으로 누릿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보여줬다. 그의 손은 혈관이 터진 것인지 푸르스름한 멍과 함께 딱지들이 덕지덕지 붙어져 있었다. 나도 몇 년째 이 모양이야. 언제 김대리처럼 될지 모르지. 아마 모두가 그럴 거야. 김대리도 그저 당연한 일에 휘말린 것뿐이야. 우리는 그저
뿌리내릴 곳을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그는 씁쓸하다는 듯이 웃었다. 서대리는 두 번째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구두로 밟았다. 하얀 연기가 구두 밑창 사이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나는 그가 버린 담배꽁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꽁초에는 서대리의 신발 모양이 찍혀 있었다.
핸드폰을 켜보니, 부재중 전화가 두 개 찍혀 있었다. 모두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화 버튼을 누르려다 문자창을 켰다. 엄마에게서 답장이 온 것을 확인한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오전 내내 적었던 서류들을 파쇄기에 갈아 넣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용인즉슨 오늘 저녁에 여기로 올라온다는 내용의 문자였다. 나는 야근을 할지도 모른다는 문자를 넣었다. 문자를 보낸 지 오 분도 안 되어서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서대리와 얘기하던 테라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놈의 회사는 야근을 밥 먹듯이 시키냐? 짜증과 걱정 섞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식새끼 얼굴 보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밥해놓을 테니까 집에 들어오면 같이 먹어.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게. 엄마는 자기 할 말만 한 채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일을 끝내니 어김없이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전철을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현관문을 여니,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가 문 사이로 흘러나왔다. 늦게도 온다. 엄마는 수저를 챙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조금 찌푸리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내 가방을 받아들었다. 차가워만 보이던 거실이 따뜻한 색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로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엄마와 마주 보며 밥을 먹었다. 엄마는 새로 담근 김치로 찌개를 끓여보았다고 말했다. 조금 맵다가도 끝 맛이 단 엄마표 찌개였다. 감자볶음, 계란말이,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엄마와 얘기할 틈도 없이 음식들을 내 입속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나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일은 어때? 힘든 건 없고?
그냥 그렇지 뭐.
라고 답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인 것은 엄마의 손이었다. 하얀 손에 푸른색 혈관이 튀어나온 손. 손등이 거칠어지고 손바닥은 굳은살로 딱딱해져 버린 손을.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엄마의 손을 만졌다. 이게 다 너 키우다가 이렇게 된 거야.라는 어떤 엄마라도 한 번은 했을 법한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작게 웃었다. 엄마는 배우가 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주말이 되면 시내에 극장에 가서 영화 세 편을 이어서 보기도 했어. 그때 표 끊어주는 아저씨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꼬마야, 너는 얼굴두 희구, 눈도 크고 하니까 연예인 하면 딱이겄어. 그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어. 근데 대학교에 들어가고 등록금 낼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했지. 학교는 학교대로 늦어지고, 그 사이에 나이가 차 버린 거야. 자연스레 취직보다는 시집가는 것을 선택하게 되더라. 그리고 너희 아빠를 만난 거야. 그리고 결혼하고, 너를 낳은 거야. 한때는 후회도 많이 했어. 배우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게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발목을 잡는 거 같더라구. 그래서 너만큼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갔으면 했어.
엄마는 일어서서 내가 먹었던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설거지하는 엄마의 뒷모습은 한 그루의 나무처럼 보였다. 좁디좁은 우리 집에 뿌리내린 턱에 엄마의 허리는 굽어 있었고, 나이테가 늘어가듯 얼굴에는 주름들이 빼곡히 지어져 있었다. 서대리의 말처럼 우리는 뿌리 내릴 곳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손등을 긁었다. 벅벅- 엄마의 손이 그릇을 한 번 문지를 때마다 벅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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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리의 소식을 들은 것은 주말이 지나고 난 후였다. 사무실 게시판에는 ‘명예 퇴직자’라는 명단 아래 서대욱이라고 적혀있었다. 서대리는 자리에서 물건들을 챙기고 있었다. 15년 가까이 일한 그의 책상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그의 상체만 한 상자가 전부였다.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가 그를 데리고 1층에 도착할 때까지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모니터를, 서류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쁨과 그에 반하는 걱정이 서려져 있었다. 나 역시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 사무실로 돌아오니, 서대리의 자리에는 새로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과장이 새로운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하얀 와이셔츠에 갈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과장은 오늘부터 같이 일을 하게 될 사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했다. 이름은 서진화라고 했다. 그리곤 우리에겐 앞으로 서대리의 일을 이어서 하게 될 서대리라고 하네. 남자는 작게 미소를 지어 웃어 보였다. 이과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제부터 서대리가 하던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게. 아니, 그야 자넨 서대리가 아닌가! 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이과장이 입에는 조금 전에 먹었던 청국장의 찌꺼기들이 끼어있었다. 서대리는 이과장을 향해 웃었다. 우리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세상이 끝날 것처럼 웃었다.
저녁에는 회식이 있었다. 새로 온 서대리의 환영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과장은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 우리에게 먹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물었다. 서대리는 회라고 말했고, 나는 삼겹살, 이과장 옆의 여직원은 육회, 그 여직원 옆의 직원은 양꼬치, 가만히 듣고 있던 인턴은 그럴 바엔 뷔페에 가는 것이 낫지 않냐고 말했다.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참으로,
실없는 웃음이었다.
웃음이 멈추고 엘리베이터도 1층에 멈추었다. 그에 맞춰 이과장은 <그럼, 감자탕집으로 가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회사 근처에 있는 감자탕 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감자탕과 소주의 향기로 콧속으로 들어왔다. 예약하셨어요? 주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물었다. 자연스레 대답은 나에게 돌아왔다. 나는 그녀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자리가 없어서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과장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굳어있던 이과장의 표정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김대리, 이런 거 하나 똑바로 못하나? 예전 김대리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과장은 혀를 차며 말했다.
우리는 급한 대로 감자탕집 옆에 있는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이과장은 고기가 나오고 다 구워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붉게 물든 얼굴로 가끔 다른 직원들이나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직원들이 건배사를 외치고, 술이 몇 잔 들어간 후에 그의 얼굴이 왜 붉어졌는지 모를 만큼 술을 마셨을 때부터 그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소주를 마시던 이과장은 반쯤 눈이 풀리자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김대리,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못 하고 말이야.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나 때는 이런 상황이었으면 회사 다니지도 못했다고, 쪽팔려서. 나는 그저, 네, 네. 그렇고 말고요. 라고 말할 뿐이었다. 요즘 애들은 이게 문제야. 뭐를 제대로 하려고 하지를 않는단 말야. 안 그래? 서대리는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그런 이과장의 말을 들으며 다시, 네, 네. 그렇고 말고요. 이과장은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숟가락을 소주병에 꽂아주며 <야, 김대리. 노래나 한 곡 불러봐라.>고 말하며 나에게 소주병을 건네줬다. 나는 소주병을 집어 들고 이과장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직원들도, 그리고 서대리도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어서 해.>
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손등이 간지러웠다. 미친 듯이 내 손등의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소주병을 든 채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변기에 토하기 시작했다. 오늘 먹었던 청국장이며, 삼겹살, 그리고 소주들이 섞여져서 튀어나왔다. 변기를 잡고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 손등을 바라보았다. 내 손등에서는 작은 새싹들이 돋아 나와 있었다. 새싹들은 내 손등에 뿌리를 내린 것 같았다. 주먹을 쥘 수도 없을 만큼 내 손등은 그들의 토지가 되어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이 삼겹살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뛰었다. 전구가 깨진 가로등을 지나고, 큰 횡단보도 두 개를 지나고, 청국장 집을 지나면서 계속해서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턱까지 차오른 숨은 고른 뒤에 고개를 들었다. 내 눈앞에는 한 마리의 잉어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간판이었다. 간판에는
‘고려당’
이라고 적혀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뿌리내렸던 김대리를 기억해냈다. 김대리는 어떻게 생겼었더라. 하얀 와이셔츠를 입었던 거 같기도 하고, 갈색 정장을 자주 입었던 거 같기도 하고. 청국장을 좋아했었던 거 같기도 하고. 23일이 결혼기념일이었던 거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느새 그는 나에게 잊힌 존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