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각자가 가진 익숙함은
나에게 있어서 꼭 지키는 루틴이 있다.
이 루틴들은 대단하지도 어렵지도 않지만 굳이 열심히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당연히 해야하는 일처럼
그렇게 일상에 스며들게끔 만들어둔다. 루틴이란, 나를 좀 더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그로인해 나의 가족들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아침 6시,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다.
그리고 아기를 확인한다. 어떤 날은 양쪽 팔, 양쪽 다리를 대 자로 뻗은 채 자고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애착 베개를 껴안고 손을 빨며 자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엎드려 웅크린 채 자고 있다. 잘 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면 옆에 자고 있던 남편을 본다. 음, 오늘도 아주 잘 잤다.
'잘 잤어?' 남편에게 꼭 물어보는 아침 인사에
'응 잘 잤어. 한 번도 안깨고 잤어. 엊그제는 야식을 먹는 바람에 새벽에 몇 번 뒤척였는데, 오늘은 안깨고 잘 잤어' 라고 대답하며 기지개를 피는 남편의 말에 나는 마음이 편안해진다. 잘 자고 일어나는 것 만큼 에너지가 충전 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침 인사가 꽤 만족스럽기도 했다.
아기방과 우리방은 2층에 있고 문을 두지 않았다. 아기가 많이 자라기 전까지 문을 닫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고 굳이 닫지도 않을 문을 달 이유가 없었다. 대신 아기 방문 앞에 커튼을 달아 두었다. 아기 수면에 도움을 주려는 의도였는데 지금까지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기 방의 커튼은 화장실 전구나 복도의 센서 등으로 한 번씩 켜지는 환한 불빛으로부터 수면을 방해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데, 분리수면을 하고 있는 아기가 잠들기 전까지 어느정도의 어두움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리고 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 아기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대화에 잠에서 깬 아기의 꼬물거리는 소리가 들려 커튼을 걷고 아기 침대로 향했다. 아직 누운 상태로 눈만 깜박이며 자기 전에 옆에 두고 자는 자동차들을 만지작 거리는 아기는 물어보지도 않은 대답을 한다.
'아기도 잘 자떠.'
남편은 보통의 퇴근 시간이 8시에서 9시 사이로 야근이 많은 편이다.
그로 인해 평일, 대부분의 육아를 담당하고 있는 나는 아기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부터 잠들기 전까지의 루틴을 단 하루도 바꾸지 않았다. 여행을 가거나 하는 특별한 상황도 최대한 루틴을 맞춰 생활했다.
어느 날은 노래를 듣고, 어느 날은 읽어주는 동화를 들으며 오는 하원길의 아기는 항상 기분이 최고로 좋다.
재밌게 놀았던 어린이집을 뒤로하고 엄마를 만나 집에가는 길이 이리도 좋은건지, 나도 함께 신나게 노래를 부르게 된다. 우리집의 정원은 봄,여름,가을,겨울이 항상 이쁘다. 정원 속 아기가 놀다가 두고 간 포크레인과 덤프트럭 장난감, 붕붕카가 자리를 잡고 있고 곳곳에 피어있는 꽃과 나무, 언제든 앉을 수 있는 나무 의자는 내 눈에 익숙함 안의 다정함을 준다. 이 다정함이 나에게 주는 에너지는 정말 크다. 내 눈에 보석이라고 나의 정원은 나에게 가장 이쁘고 가장 특별하다.
열린 현관문에 몸을 바짝 기댄 채 짧디 짧은 팔을 뻗은 채 큰소리로 말한다.
'엄마! 불도저 주세요!'
집에 오자마자 나에게 장난감을 더 꺼내달란다. 본인은 더 놀아야하기 때문에 신발을 벗을 수 없어서.
한 참을 정원에서 놀다보면, 들어가자~들어가자~ 꼬시지 않아도 잘 들어오게 된다. 원하는 만큼, 모래를 만지고 놀고나면 스스로 해야 할 일도 하게 된다. 손 씻고 나면, 우다다다다 뛰어가 장난감통 안의 맘에 드는 자동차를 꺼내기도 하고, 조카에게 물려받은 기차들을 꺼내기도 한다. 듣고 싶은 동화 이야기에 집중하기도 하고 블럭을 꺼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이도 저도 다 싫다고 내 바지가랑이 붙잡고 투정을 부리는데 보통 이럴 땐, 분명 이유가 있다. 배가 고프거나 졸리거나, 혹은 어딘가 몸 상태가 안좋거나.
저녁 식사 시간은 곧바로 시작하는데, 보통 5시에서 6시 사이에 시작한다.
6시가 조금 넘으면 아기는 '까까 주세요, 요쿠르트 주세요' 라며 그날마다 생각이 나는 달디 단 간식을 말하며 바닥에 들어눕거나 저녁 식사를 거부하기도 한다. 나는 철저히 그런 행동을 통제하고자 식사는 항상 조금 앞당겨서 먹인 후 간식을 주려고 한다. 아기새처럼 벌리는 입에 양 껏 저녁밥을 먹이면 그렇게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나의 행복 포인트인 것 같다. 빵빵해진 아기 배를 보며 깨끗하게 샤워를 시키고 나면 이제 밤잠 준비 루틴에 들어간다.
포근한 이불과 애착배게가 있는 침대에 누워 읽고 싶은 책을 열심히 골라온다.
책 읽기는 지금 아기에게 자기 전 루틴으로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정적인 활동이자 아기와 가장 많은 스킨쉽을 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서로 붙어서 책을 넘기고 눈도 마주치다 보면 아기가 잠들기 전까지 최대한 편안하고 포근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0분에서 1시간정도 함께 읽고 놀다보면 '이제 잘까?' 라는 말에 후다닥 좋아하는 자동차 하나 챙겨 침대 안으로 들어간다.
저녁 8시반,
'아기야 잘자 사랑해' 잘자라는 말을 마치고 커튼을 치고 나오는 나의 등 뒤로 아기도 말이 많다.
'아기도 사랑해 잘자 빠빠이'
벅차는 따뜻함이 이런 기분일까.
미소를 넘어 웃음이 지어지는 아기의 말을 들을 때마다 행복하다라는 감정을 가진다.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 루틴을 더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한 매일 저녁에 함께하고 싶다.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면 남편이 들어온다.
밖에서 일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어느날은 나에게 먼저 물어본다.
'고생했지?'
'아니야, 일하느라 당신이 고생했지.'
회사생활 해봐서 알지만, 일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남편의 이 한마디가 나를 일어나게 만든다.
'앉아서 일하는 것보다 육아가 훨씬 고생이지, 씻고 푹자자'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보낸 서로에게 등을 두들겨 주면, 그래. 이걸로 되었다. 감사하게 살자.
또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