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革)'이라는 글자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2002년 초임 시절 교감 선생님이다. 나는 그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한 번은 내가 맡고 있는 'NGO' 동아리에서 학생들과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학교 자판기 문제를 다루기로 했다. 자판기 음료수 가격이 시중보다 높았는데, 학교 내에서는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자판기의 비싼 가격 그대로 구매해야 했다. 교문 밖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슈퍼마켓과 비교를 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가격을 독점적 지위를 이용하여 이윤을 취하는 것은 학교라는 교육기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고, 학생들과도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구체적 행동 전략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학교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주요 품목의 가격을 학교 주변 상점의 물건 가격과 비교한 내용을 전교생과 교사들에게 알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자판기 업자는 자연스럽게 가격 조정을 해 올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조사한 내용을 대자보로 홍보하고, 동아리 시간에는 학생들이 전교생에게 알렸다. 이런 활동을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교감 선생님이 호출을 했다.
"유 선생님, 잠깐 저한테 오세요."
각오했던 일이다. 분명 이런 활동에 제동을 거는 이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빨리 불렀다. 나는 교감 선생님이 이 일에 간섭하고 제지한다면 한바탕 큰 싸움을 치르려고 했다. 학생들과 함께 부당하고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바로잡겠다고 나섰는데 힘없이 물러서 버리면 학생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눈에 힘을 주고, 마음을 몇 번 가다듬으며 교감 선생님한테 갔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한테서 의외의 말을 들었다.
"유 선생, 세상은 그렇게 바꾸는 거예요." 청년 헤겔에 대해 한참을 말하며, 세상과 투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혁(革)이라는 글자가 있어요. 피는 겉가죽이고, 혁은 무두질해서 털을 없앤 가죽이에요. 피를 손질해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이지요. 손질해서 그것이 가진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 변혁(變革)이고, 혁명(革命)인 거예요. 옳은 것을 숨기지 말고 실천하세요."
눈물이 날 뻔했다. 교감 선생님의 말씀에 힘입어 운동을 계속했고, 자판기 음료수 가격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교감 선생님의 그때 그 말씀을 지금도 마음에 새기며 살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옳은 일이라면 변화를 꺼리지 않으려고 한다.
마음 깊은 곳(☱)에 밝고 떳떳한 생각(☲)을 가지고 후배 교사를 변화시킨 교감 선생님 생각하니 택화 혁(革) 괘가 떠오른다.
䷰ 택화 혁
<주역전의>에서 혁(革) 괘에 대해 "괘 됨이 태(兌)가 위에 있고 리(離)가 아래에 있으니, 못 가운데 불이 있는 것이다. 혁(革)은 변혁(變革)이니, 물과 불은 서로 멸식(滅息)시키는 물건이니, 물은 불을 끄고 불은 물을 말려서 서로 변혁(變革)하는 것이다. 불의 성질은 위로 올라가고 물의 성질은 아래로 내려가니, 만일 서로 떠나가면 규(睽)가 될 뿐인데, 마침내 불이 아래에 있고 물이 위에 있어 서로 찾아가 서로 이기니, 서로 멸식(滅息)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혁(革)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신도시
'변화'를 뜻하는 말로 'innovation'이라는 단어가 있다. 'in(안)+nova(새로움)'의 합성어인 'innovation'은 '안에서부터의 새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안에서부터 새롭게 되면 밖의 모습은 자동으로 바뀌게 되어 있다. 안부터 밖까지 모조리 바뀐다는 말인 'innovation'은 '묵은 것을 새롭게 한다.'라는 뜻의 한자어 '혁신(革新)'과 의미가 통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굳이 크게 변할 것이 뭐 있나 싶지만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국토 불균형 문제를 당장 손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이후 성장 거점 개발 전략으로 단기간에 경제 성장을 이루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급속한 성장은 지방을 희생한 수도권 및 대도시 중심의 성장이었기 때문에 지역 격차가 심화되었다. 아래의 그림처럼 현재 우리나라는 인구, 지역 내 총생산, 지방세, 활동 기업 수 등 다양한 지표에서 수도권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수도권에 기능이 집중하여 실업률이 증가하고 집값이 상승하면서도 지방에서는 인력부족에 허덕이고 생산 능력이 악화되고 있는 현상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비수도권이 삶의 공간으로서 활성화되어야 수도권도 지속 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출처:시사저널(기사제목 : 수도권비수도권,두개의 대한민국, 2020.02.04)
이에 우리나라는 2000년대 들어 수도권 발전과 지방 육성을 위해 '혁신도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혁신도시라고 하면 수도권에 있던 관공서와 공공 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는 사업으로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혁신도시 사업의 핵심은 단순히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옮기는 데 있지 않다.
현재 전 세계의 기업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다른 기업에 비해 생산 비용에서 우위를 차지하거나 기술로써 차별화된 생산품을 만들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다. 일본의 대표 기업인 소니나 파나소닉이 차별화된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해 주춤거리는 것을 보면 급변하는 세계 경제에서 기업들이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대기업 중심의 경직된 하청 네트워크로는 급격히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선진국에서는 지역에 기반한 혁신체계를 구축하여 관리하고 있다.
영국의 캠브리지 테크노 폴, 프랑스의 소피아 앙티폴리스, 캐나다의 몬트리올 멀티미디어 시티 등이 그런 곳이다. 기업, 대학, 연구소, 정부가 네트워크를 만들어 기업은 생산을 통한 이익을 대학과 연구소에 공급하고, 대학과 연구소는 기업에게 고급 인력과 기술을 제공하였다. 정부는 기업 활동에 필요한 제도적 지원을 하는데 이것들이 지역이라는 틀 안에서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혁신도시 사업의 목적은 결국 산학연관의 긴밀한 네트워크를 통해 지방의 경쟁력을 살리는 데 있다.
마트에서 볼 수 있는 나주의 머스크멜론, 고창의 복분자, 보성의 녹차가 지역 혁신 네트워크의 산물이며, 원주 의료기기 산업, 전주 첨단기기 산업 등이 우리나라의 산학연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혁신도시로의 관공서이전'은 혁신 네트워크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봐야지 '혁신도시=관공서 이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국토연구원에 따르면 약 180개 기관의 종사자 3만 2천여 명이 이전할 경우 약 13만 3천 개의 고용 유발 효과가 발생하며, 약 9조 원이 넘는 생산 유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기 때문에 관광서 이전은 지방 경제를 살리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출처: 국토교통부
지방 소멸이라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 혁신 도시 사업이 성공하여 수도권과 지방이 지속 가능한 공존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혁신학교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는 혁신학교이다. 경기도 교육청에서 지정받은 이름이 그렇다. 그런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이름이 부담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바꿔도 바꿔도 뭔가를 또 바꿔야 할 것 같은 이름이라 늘 부담스럽다. 교육청에서 밀고 있는 혁신학교의 모토는 '민주성', '윤리성', '창의성', '전문성'인데, 이것 또한 의미가 모호한 감이 있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손발이 어지럽다.
'사랑을 찾아 떠나지 말라. 사랑은 개념이 아니라 그 행위에 담겨 있는 것이다.'라시던 혁신대학원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혁신교육이라는 말에 집착하지 않으련다. 관심에서 소외된 아이들,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조용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