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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 작가 Jan 30. 2022

지리교사 주역을 만나다.

48. 수풍(水風) 정(井): 노루우물 이야기

앉아서 명상을 한다. 이번 생은 사람 가죽을 입고 태어났으니 사람 노릇하며 살지만 참으로 번잡스럽다. 희로애락애오욕의 미묘한 감정들과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생각들, 육체로 들어오는 감각들을 죄다 상대해야만 하니 피곤하기 이를 데 없다. 한평생 사람으로 살아야 하기에 번뇌를 끝낼 수는 없는 일, 잠시 생각, 감정, 오감을 내려놓고 본래의 자리에 머물 뿐이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은 받침대가 없는 것

불성은 항상 청정하거니와

어디에 티끌 있으리오.


마음이 본래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이라.

밝은 거울은 본래 청정하거니와

어디가 티끌에 물들이리오."


육조 혜능의 게송이 들린다.

명상을 끝내고 화장실에 가니 하얀 변기 속 맑은 물에 비친 내 얼굴이 우물 속 비친 달 같다. 우물에 비친 달은 그림자가 없다. 잠시나마 번뇌에서 벗어나니 티끌도 마음에 달라붙지 않는다.   

수풍 정(䷯, 井)의 괘사에 "읍은 고치되 우물은 고치지 못하니,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가는 이와 오는 이가 우물을 푸고 물을 마신다."라고 하였다. 마치 괘사를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나라 문왕이 불성을 깨달아 말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수풍 정의 괘사는 "본래의 자리는 변하지 않아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누구나 찾을 수 있구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노루 우물과 장소성

내가 사는 마을에는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다. 이름은 '노루 우물'이다. 시흥으로 발령이 나서 와보니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아파트 부지로 '노루 우물'을 포함시키면서 마을 주민들과 갈등이 있었다. 아파트 부지를 더 확보하여 이윤을 추구하는 개발업자와 우물을 보존하려는 마을 주민들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에 마을에 오랫동안 살았던 주민들을 중심으로 우물 보존 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학생들과 이웃 주민들도 동참하는 분위기였다. 마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는 이 우물이 500년 이상 되었으며, 연세가 있는 주민들에게는 어릴 적 빨래하고 멱 감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장소라고 주장했다. 마을이 들어설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물이고, 오래전부터 마을의 용수로써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곳이라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노루 우물은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연못이 강원도 태백의 황지 연못(낙동강 발원지)이나 검룡소(남한강 발원지) 등 유명한 못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황지 연못은 태백시 황지동 복판에 있다.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낙동강의 수원지라는 장소의 특수성 때문에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황지 주변에는 이곳에 찾아온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 시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특히 '물닭갈비 집'이 성황을 이루는 곳이다. 첩첩산중에 위치한 황지에 장소적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면 이 지역 사람들은 지금의 상업 시설을 운영하며 이곳에 모여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노루 우물이 역사성과 더불어 경제적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물 보존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마을의 주요 유적들을 조사하게 하고, 노루 우물을 이용하여 마을을 알릴 수 있는 수업을 조직했다. 학생들도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일이라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에 위치한 황지. 낙동강의 발원지라는 장소성을 바탕으로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쟁점으로 부각된 노루 우물 보전운동은 2014년 7월부터 '노루 우물 보전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위원회는 학술 대회, 주민들의 시위, 노루 우물 보존 기원제 등을 잇따라 전개했다. 결국, 주민들의 노력으로 2015년 11월 LH공사는 노루 우물을 보전하는데 합의하였고, 노루 우물은 수백 년 간 있었던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노루 우물 보존 운동이 성공을 거두자 마을에서는 '장곡 노루마루 축제'를 열어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 되었음을 기념하고 있다.

노루 우물의 옛 모습을 살려 조성한 노루 우물

노루 우물은 주역의 괘상으로 보면 수풍 정(井, )에 해당한다. 수풍 정은 상괘나 감(☵), 하괘가 손(☴)이다. 손(☴)은 '들어감', '나무', '쏟음'을 상징하고, 감은 '하늘의 은택', '험난함', '물'을 상징한다. 물(☵)이 나오는 우묵한 곳(☴)이 우물(䷯)인데, 우물(䷯) 안의 나무(☴)가 물(☵)을 담아 위로 올라오는 모양(2,3이 양인데, 하괘에 위치해 있으니 위로 올라감의 뜻이 있다.)이다.

<주역전의>에서 정(井) 괘에 대해 “괘 됨이 감(坎)이 위에 있고 손(巽)이 아래에 있으니, 감(坎)은 물이며 손(巽)의 상(象)은 나무이고 손(巽)의 뜻은 들어감이다. 나무는 그릇의 상(象)이니, 나무가 물 아래로 들어가서 물을 퍼올림은 우물을 긷는 상(象)이다."라고 하였다.

䷯ 수풍 정


우물의 전설

노루 우물에 관한 전설이 있다.

옛날 마을에 큰 부자가 살았다. 그는 성격이 고약하고 탐욕스러워 가난한 이를 함부로 대했고, 동냥 오는 이들을 내쫓았다. 하루는 고명한 스님에게 어찌하면 우리 집에 동냥아치나 비렁뱅이가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스님은 대답했다.

"뜰 앞에 있는 노루 바위를 깨뜨리면 다시는 비렁뱅이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스님의 말을 듣고 부자는 망치로 노루 바위의 목을 부숴버렸다. 그때 노루 바위의 목에서 선혈이 뻗쳐올랐다.

그 후 집은 차차 몰락하고 말았고, 다시는 동냥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피가 흘러넘친 곳이 노루 우물이 되었다. 그 뒤로 마을에는 지나가는 과객이나 걸인들에게 대접하는 풍습이 생겨났으며, 가난한 이를 돕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우물물은 쓰면 다시 채워진다. 이웃을 아끼는 사랑의 마음도 그렇다. 감(☵)은 하늘의 은택이요, 손(☴)은 베풂이다. 우물의 전설에 수풍 정(䷯)의 지혜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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