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날 식구들과 함께 본가로 향했다. 어머니 앞에 손주들 보여드리면 주름살 활짝 펴시리라는 기대를 하며 운전대를 잡는다. 아이들은 세뱃돈 받을 생각에 싱글벙글이다. 그런데 아내의 표정은 좋지 않다. 집에 홀로 계신 장모님 두고 시댁 가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다. 다행히 가까이 사는 처제들이 시댁에 이미 다녀와서 장모님은 오늘 밤 처제네서 주무시기로 하셨다. 국어사전에는 '해마다 정하여 즐기는 날'이 '명절'이라 하였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은 명절을 맞는 사람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국도에는 평일보다 교통 상황이 좋았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뚫린 서울의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르자 완만한 언덕길이 하나 나온다. 이 언덕의 이름은 '가마산'이다. 둥그스름한 언덕이 가마솥을 닮은 탓이다. 본가는 가마솥 뚜껑 손잡이에 해당되는 부근에 있다. 쇠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니 동생은 전을 부치고 있고, 어머니는 솥에다 고기를 삶고 계셨다. 식구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칠순 지나시자 부쩍 체력이 약해지신 어머니는 차례 음식 만드시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신다. 다행히 결혼 안 한 막내아들이 음식 준비를 옆에서 열심히 돕고 있었다. 어머니는 음식 준비를 다 했으니 너희는 할 것이 없다며 앉아 있다가 밥이나 먹자고 하신다. 가끔 보는 큰아들 네 식구들을 아끼는 어머니 마음이 느껴지자 자주 찾아뵙지 못해 송구한 마음이 든다.
어머니는 상을 한가득 차리셨다. 노량진에서 홍어를 잡아 홍어무침, 홍어전을 부치셨다. 각종 전과 무침, 묵, 수정과와 식혜 등 손 많이 가는 음식이 한가득이다. 차례상 준비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차례 음식을 조금만 차리라는 큰아들 성화는 뒷전이고, 자식들 푸짐하게 먹일 생각만 하시느라 어머니의 몸은 고되다.
자식들 앞으로는 어머니의 자신감이 담긴 소고기 뭇국이 뜨끈하게 놓였다. 어머니의 소고기 뭇국은 맛있기로 유명한데, 이 음식을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잊지 못하고 또 찾는다. 어머니는 무와 소고기를 큰 솥에 통째로 삶아 육수를 내고 국그릇에 담아내기 직전에 무와 소고기를 따로 꺼내 썰어내신다. 그러면 무의 단맛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시원한 맛을 내는 동시에 소고기의 부드러운 식감까지 느낄 수 있다. 쌍둥이 아들들은 할머니 댁에 와서 내리 세 끼를 소고기 뭇국으로 밥을 먹었다. 자식들 먹는 모습에 어머니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머니가 고기를 삶는 솥을 보니 화풍 정(鼎, ䷱) 괘가 떠오른다.
정 괘는 상괘가 리(☲), 하괘가 손(☴)이다.
<주역전의>에너는 정 괘에 대해 "상·하의 두 체로써 말하면 가운데 빈 것이 위에 있고 아래에 발이 있어 받드니, 또한 솥의 상이다. 그 뜻을 취하면 나무가 불에 따른 것이다. 손(巽)은 들어감이니 순종하는 뜻이니, 나무가 불에 순종함은 태우는 상(象)이 된다. 불의 쓰임은 오직 굽는 것과 삶는 것인데, 굽는 것은 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삶는 상(象)을 취하여 솥이라 하였으니, 나무로써 불에 순종함은 팽임(烹飪, 음식을 삶아 요리함)의 상(象)이다."라고 하였다.
䷱ 화풍 정
'요리왕 비룡'에서 '냉장고를 부탁해'로 가는 지역 발전 전략
25년 전 방영된 '요리왕 비룡'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최고의 요리사들이 요리 경연을 치르는 내용이다. 요리사들은 '최고의 요리사'라는 영예를 얻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데, 같은 식재료를 부여받은 요리사들은 자신만이 가진 기술을 이용해 요리를 만든다. 이들이 하는 경연은 부여된 재료가 같기 때문에 보다 특별한 기술을 가진 요리사가 더 특별한 요리를 만들 수 있고, 결국 경합에서 승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스토리 전개는 초창기(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지역 혁신 정책의 진행 과정과 유사하다. 이 시기 정책은 중앙정부가 주도하여 혁신 모델을 설정하고, 중앙정부 주도로 혁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지방자치단체나 기업, 연구기관 등 다른 혁신 주체들의 역할은 애니메이션의 요리사들처럼 있는 재료만 가지고 요리하는 종속적인 지위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기업, 대학, 연구소 등 혁신 주체들은 자발적으로 네트워크를 구성하거나 노하우를 집적하는데 한계가 있었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에도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방향은 비판을 받으며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2014년~2019년까지 방영된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요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콘셉트는 '집집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다른 식재료를 이용해 그에 맞는 요리를 한다.'라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가진 재료가 다르고, 그 재료를 일류 요리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하니 그야말로 독특한 레시피, 창의적인 음식들이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의 규칙 중 하나는 요리를 하기 위해 새로 식재료를 추가로 구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리사 자신이 처한 현재 상황에서 요리를 진행했다. 남으면 남는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식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창의적이고 독특한 요리들이 탄생했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지역 개발의 두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각 지역이 보유한 인적·물적·사회적·문화적 자원을 최대한 살리면 자원의 낭비를 막고, 고용을 높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둘째, 각 지역은 그만의 역사와 문화, 자연환경 등 독특한 장소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유일한 가치를 지니며, 이것이 네트워크를 이루어 조화를 이룰 때 지역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실제로 유럽 연합에서는 RIS3(스마트전문화를 위한 연구 혁신)라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다양한 혁신 주체들의 역동성과 이질적인 지역적 맥락(regional context)을 고려한 장소 기반의 지역 혁신 정책을 펴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장소 기반의 지역 혁신 정책은 지역의 자원과 잠재력을 활용하는 차별적인 발전전략의 수립을 강조하고 있으며, 다양한 규모의 지역에서 '지역 그 자체'가 '최적'이므로 그 안에 있는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아래 사례는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의 관광 안전 네트워크를 이용한 통한 지역 혁신 사례이다. 공공부문에서는 안전과 치안을, 인근 대학에서는 관광 프로그램을, 지역의 각종 협회에서는 교통 및 치안, 보건 등을, 관광 산업체에서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줌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독특한 점은 산업체, 대학교, 연구소, 지방정부 이외에도 지역의 협회, NGO 등 지역의 인적 자원들도 혁신의 주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핀란드 라플란드의 '관광 안전 네트워크'는 그 지역에 있는 인적·물적 자원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지역의 혁신과 경쟁력을 확보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지역 RIS3 거버넌스 구성 사례: 라플란드의 관광 안전 네트워크(출처:EU지역혁신정책의 동향 및 사례 연구: 스마트 전문화 전략(RIS3), EU연구, 2020년 제 56 호)
솥(☲)에 넣고(☴) 삶으면 재료의 질이 변한다. 솥(䷱)의 덕은 질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지역 혁신 정책이라는 솥을 사용해 우리 국토 전체가 경쟁력 있는 맛난 요리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솥의 풍요로움
설을 지내고 집에 돌아오니 장모님이 솥에 한가득 갈비를 넣고 핏물을 빼고 계셨다. 우리 장모님 요리 중에 단연 최고는 양념갈비다. 고기를 좋아하는 아내는 눈이 동그랗게 변한다. 핏물 뺀 고기는 각종 과일과 양념으로 버무려지고, 양념이 충분히 밸 정도로 조려준다.
상으로 올라온 양념 갈비 주변으로 식구들이 모였다. 화풍 정의 상괘와 하괘가 자리를 바꾸니 풍화 가인이 되었다. 자식들 입으로 들어가는 고기를 보시는 장모님 이마의 주름이 펴진다. 식구들이 행복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