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화수(火水) 미제(未濟): 제자리를 찾아야 할 때
나는 <중용>의 내용 중 '시중(時中)'이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상황에 달라질 때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시중(時中)'이다.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아이 엄마는 아이 엄마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자신의 자리를 알고 노력할 때 사회는 안정될 수 있다는 것이 '시중(時中)'의 가르침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는 그 반대편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단추를 언제부터 잘못 끼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를 위해 청춘을 보내고 있고, 직장인들은 몸 하나 기댈 거주지를 구하기 위해 빚을 지고 있다. 수많은 신혼부부들은 헬조선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아이 낳는 것을 포기했고, 농부들과 노동자들은 자본의 논리에 짓밟히고 있다. 효율성만 앞세운 국토개발 정책으로 인해 지방 중소도시들은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소멸 단계에 들어섰다. 어떻게 우리 사회가 이지경이 되었을까?
주역의 64번 째 괘인 화수(火水) 미제(未濟)가 떠오른다.
'미제(未濟)'는 '건너지 못했다.'라는 의미이다. 어떤 일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말이다. 화수 미제 괘(䷿)는 불(☲, 離)이 위에 있고 물(☵, 坎)이 아래에 있어 위로 올라가는 불과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이 서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화수 미제 괘는 63번째 괘인 수화 기제 괘(䷾)와는 다르게 모든 효가 제 자리에 있지 못하다.(양(1,3,5)의 자리에 모두 음효가, 음(2,4,6)의 자리에 모두 양효가 있어 여섯 효 모두 자리가 바르지 못하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나머지가 모두 어긋나는 것처럼 모든 자리가 어긋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표류하는 모습에서 화수 미제가 보인다.
우리의 삶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광막하게 넓은 우주 공간, 영겁의 세월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8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이들은 크고 작은 네트워크로 형성된 다양한 사회를 만들어 서로 영향을 주며 살고 있다.
힌두교 신화에는 '인드라망'이라는 것이 있다. 인드라는 힌두교 신들 중에 가장 강력한 신인데, 그가 사용하는 무기가 '인드라망(因陀羅網, 인드라얄라·indrjala)'이다. 인드라망은 인드라가 거주하는 수미산 꼭대기 하늘나라 도리천 선견성(善見城)에 펼쳐져 있는데,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 있다. 그리고 구슬들은 다른 그물코에 달린 구슬이 비쳐진다. 이쪽 구슬에 비쳐진 모습이 저쪽 구슬에, 저쪽 구슬에서 비쳐진 모습이 이쪽 구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구슬들은 중첩되어 서로 영향을 끼치며 끝 없이 펼쳐진다. 인드라망에 선한 모습을 비추면 모든 사람들이 선한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악한 모습을 비추면 모든 사람들이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의존적이다. 나는 학생들과 20여 년 공부하면서 세상이 공간적으로 촘촘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컴퓨터, 스마트 폰, 태블릿 pc 등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자 제품에는는 구리, 주석, 납, 콜탄, 각종 희토류 등의 물질들이 들어간다. 이 중 콜탄(coltan)의 경우 값이 비싸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은 이것을 확보하기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콜탄의 전체 매장량의 70% 이상이 아프리카의 콩고민주공화국 열대우림에 분포한다는 사실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아프리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내전이 있는 극심한 지역이다. 이 콜탄을 이용해 반군들이 전쟁 자금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이 길게 지속되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지역 주민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못해 기근에 허덕이게 된다. 콜탄 채취를 위해 동원된 지역 주민들은 무리한 노동착취로 인해 질병 상태에 쉽게 노출되고 있으며, 이곳 열대 우림 지역에 서식하는 고릴라들은 노동자들의 식량으로 포획되어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열대우림이 파괴되어 지구온난화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내가 전자 기기를 사용하면 그 만큼 삶이 편리해진다. 그리고 전자 기기를 생산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더 많은 수익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콩코민주공화국과 같은 제3세계 국가 주민들에게는 저주가 되었고, 열대우림의 고릴라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인간은 인드라망에 자신들의 이기심을 드리웠고, 그 결과가 세상에 펼쳐져 어딘가는 삶이 어그러지고 있다.
콩고민주공화국의 열대우림에 살고 있는 고릴라들은 콜탄 등 자원 채취로 인해 서식지 잃고 있다.
우리는 그것이 좋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 다 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나가 삐뚤어지면 세상 전체가 삐뚤어질 수 있고, 구성원들은 원래 머물렀던 그 자리에 머물 수 없게 된다. 고릴라는 고릴라의 자리에, 열대 우림은 열대 우림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자리를 보존해야 한다.
화수미제는 구성원들 모두가 제 자리를 잃었다. 인드라망에 나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들이 세상에 많지만 또한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더 좋은 상태로 바뀔 수 있다. 주역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 나쁘게 변할 가능성이 있고, 나쁜 것은 좋게 변할 가능성을 갖고 있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요즘 짓는 학교는 교실에 온돌 기능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된 학교는 아직도 겨울에 발이 시렵다. 온풍기는 천장에 달려 있어 공기는 뜨겁고(☲), 바닥은 시멘트의 한기로 차갑다(☵). 머리는 불처럼 뜨겁고, 발은 물처럼 차가워 마치 아픈 느낌이다. 퇴근 시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오한이 들어 바로 병원에 갔다. 검사를 받았는데 양성이 나왔다.
화수 미제 괘(䷿)를 찾아 몇 주간 해메고 돌아다녔는데 이렇게 쉽게 내 몸에서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