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한 런던 박물관 유람 - 들어가며

왜 런던에서 아이와 박물관에 다녔는가?

by Muswell

한때 박물관을 참 좋아한다고 착각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주변 사물을 이용하여 고문 기술자에 버금갈 정도로 기상천외한 체벌(예: 줄넘기 줄, 영한사전)을 선보였던 국사 선생님 덕분에 역사는 입시 과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오히려 대학교 입학 후 본격적으로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졸업 때까지 적어도 한 학기에 역사 관련 과목을 한 과목 이상 수강했다. 졸업 학기에 들었던 한국미술사입문 과목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을 하나 골라 작품에 대한 나름의 해석 등을 발표하도록 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견한, 매우 유명한 화가인 겸재 정선이 그린 전혀 유명하지 않은 '북원수회도'라는 그림에 대해 발표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도 재미있게 들었고 발표에서도 강사님께 좋은 평가를 받은 덕택에(라기보다는 학점이 잘 나온 덕에) 나의 역사와 박물관에 대한 애정은 학부 졸업을 앞두고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이 착각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그럭저럭 유지되다가 영국에 공부를 하러 오게 되면서 산산이 깨지게 되었다. 실제로는 갔다 온 사람들만 무용담을 늘어놓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남들은 대학생 시절 다 갔다 왔다던 유럽 배낭여행을 못 가본 탓에 런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석사과정 시작을 1주일 앞두고 런던에 도착해서 빅벤, 런던 아이 등 여행객들이 주로 가는 장소를 훑다가 둘째 날 즈음에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방문했다. '영국박물관은 아주 크기 때문에 하루에 볼 수 없다고 들었는데 어차피 과정 시작까지는 시간도 남았고 한 3~4일에 걸쳐서 천천히 보면 되겠네'라는 호기롭고 무모한 생각을 가지고 박물관에 입장하였다. 그런데 두세 시간에 걸쳐 박물관 1층 서쪽 날개(wing)에 있는 전시실인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고대 그리스 등을 본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아테네에서 통째로 뜯어와서 전시해 놓은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들을 보면서 '참 도둑질 꼼꼼히도 했네'라는 생각만 했을 뿐 막상 이 전시물이 'Elgin marble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였다. 푸드코트에서 먹었던 비싼 샌드위치는 지친 심신을 더욱 축 처지게 하는 맛이었고 결국 소박한 규모의 한국 전시실만을 대충 둘러보고 박물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약 2년 후 박사과정 1년 차 시험이 끝나고 지겹도록 할 일이 없던 때가 되어서야 다시 그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런던의 다른 박물관, 그리고 방학 때 시간 내어 여행했던 유럽 다른 도시의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하게 펼쳐졌다. 난 내가 박물관을 좋아하는 소위 지성인(당연히 내 멋대로 생각한 '지성인'의 정의다.)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상적인 자아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한 것은 아니고 살짝 실망한 수준이지만 어쨌든)하고 있던 중 왜 내가 박물관에 가면 힘들어하는 이유에 대한 실마리를 한 TV 프로그램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온갖 박물관 및 기념관을 방문할 때마다 소개글만 보이면 읽어대는 유시민 작가의 모습을 보고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박물관에 갈 때 왠지 전시물 옆에 딸려 있는 소개글을 다 읽고 그 내용을 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와중에 그 소개글은 다 영어로 되어 있으니 내가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박물관에 갈 때는 되도록이면 소개글 말고 전시물에 집중하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물론 그 다짐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사람 쉽게 안 변하더라.)



사실 박물관에 대한 고민은 사소할 정도로 유학 온 후 인생에서 큰일이 많이 일어났다. 석사과정에서 박사과정으로 넘어가던 여름방학 때 결혼을 했고 박사과정 중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였다. 영국 병원에서는 임산부의 자기 치유 능력에 대해 쓸데없이 높은 신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임산부에게 실제로 해 주는 것이 거의 없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우리는 한국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였다. 아이가 태어난 후 약 10개월 정도 아내는 처가에 머물렀고 나는 방학 때마다 한국에 드나들며 정말 힘들다는 신생아 아빠 시기를 제대로 꿀 빨며 보냈다. 그리고 아이가 11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 우리 가족은 런던으로 함께 왔다.


많이 알려져 있는 대로 런던의 날씨는 끔찍하지만 1년 내내 날씨가 안 좋은 것은 아니다. 5월부터 9월 정도까지는 많이 덥거나 습하지도 않고 해도 많이 비치고 낮도 길어서 사실 한국에 비해 날씨가 훨씬 좋은 편이다. 이렇게 날씨가 좋을 때는 아이를 데리고 런던 곳곳에 있는 공원에 가면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 우리 아이는 뛰어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낮이나 이른 저녁에 공원에 다녀오면 밤에도 별 무리 없이 잘 잤다.


문제는 해도 짧아지고 날도 추워지고 흐린 날씨가 거의 매일 지속되는 겨울이다. 런던은 겨울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워낙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많이 오기 때문에 실제 기온에 비해 날씨가 더욱 춥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이런 날씨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바깥 활동을 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특히 해가 짧을 때는 오후 3시 반부터 어두워지기 때문에 낮잠을 재우고 나서 밖에 데리고 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 아이는 아들인데 낮잠을 잔 후 충분한 육체 활동을 못 하면 밤에 자는 시간이 늦어진다. 애초에 내 아들은 나의 까다로운 잠버릇을 그대로 물려받아 (왜 이런 것만 닮니...) 잠드는 걸 상당히 힘들어하는 아이다. 아이가 밤에 늦게 잠들면 내 아내와 나는 원래도 길지 않았던 여가 시간이 줄어든 데 분노를 느끼며 여가 시간을 보존하기 위해 잠을 줄이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되고 결국 만성 피로에 시달리게 된다.


이렇게 부부가 같이 피폐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하루는 같은 직장에서 공부하러 나와 있었고 거의 비슷한 나이의 아들을 키우고 있던 친구 한 명이 주말에 런던교통박물관(London Transport Museum)에서의 만남을 제안했다. 입장료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단 가 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런던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국공립 박물관이 많은데 겨울에는 아이와 함께 박물관만 찾아다녀도 괜찮겠구나!' (김 교수, 고마워.) 그래서 구글에 'London museums for children' 따위를 검색해 가면서 도장깨기 하듯 이곳저곳 박물관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활자 집착으로 인해 소원해졌던 박물관과 나 사이가 아이와 런던의 겨울을 매개로 극적으로 부활한 순간이다.



앞으로 아들과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님과) 같이 갔던 런던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해 보려 한다. 여러 사진을 첨부하여 각 박물관에 대해 근사한 소개글을 쓸 능력까지는 안 되기 때문에 순전히 내가 박물관에서 아이와 같이 했던 활동이나 같이 보았던 전시내용을 중심으로 가벼운 글을 쓸 계획이다. 즉, 각 박물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이 글보다는 구글 등의 검색 엔진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이다. 런던에서 아이를 키우며 거주하시는 분들이나 아이를 데리고 런던에 방문하신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많이 읽히지는 않더라도 내 아들이 커서 이 글을 보았을 때 아빠가 같이 재미있는 시간 보내려고 많이 노력했구나 생각하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아까 저녁때 양치시키면서 가만히 안 있는다고 소리 질러 놓고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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