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주둥이를 한 방 맞기 전까지는...
'왜 당신은 영국으로 유학 갈 생각을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잠시 시계를 2017년 11월의 어느 날로 돌려보겠다. 그 날 저녁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과 그 해 10월에 석사과정에 입학한 한국인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모임의 명목은 박사과정 진학에 관심 있는 석사과정 입학생들을 위한 조언이었다. 사실 경제학의 경우 이 학교에 계속 남으려면 좋은 연구계획서나 추천서보다는 그냥 시험 잘 봐서 좋은 성적을 받으라는 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의 전부였지만 당시 가족과 잠시 떨어져 있어 지친 영혼을 조금이라도 달래 볼까 해서 모임에 갔다.
여러 가지 다른 학문을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왜 영국, 그리고 이 학교에서 박사과정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듣다 보니 대부분이 유학 오기 전부터 영국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들이 하는 분야에서 이 학교가 우수하기 때문에 이 곳을 선택했다는 대답을 하고 있었다. 순간 '이 순수한 영혼들(이라기에는 석사과정 학생들이니 나이가 꽤 있었겠지만 어쨌든) 앞에서 내가 굳이 분위기를 깨는 얘기를 들려줘야 하나'라는 소심한 고민에 빠졌다. 다른 아름다운 이야기를 꾸며낼 여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저는 회사를 다니다 연수에 선발되어 왔는데 회사 사장님의 변덕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는 학교의 범위가 줄어들면서 지원했던 미국 학교들은 다 떨어지고 영국에 있는 이 학교에만 합격해서 어찌어찌 박사과정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전 세계 경제학의 중심은 미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우리나라가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기도 했고 해외에서 유학한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인식이 퍼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나도 경제학 유학을 생각했을 때 미국 아닌 다른 곳을 고려해 본 적은 없다. 최소한 사장님의 변덕을 마이크 타이슨의 펀치처럼 내 주둥이에 정통으로 맞기 전까지는 말이다.
좋다고 하기에는 어설픈 학점, 성적이 약간 잘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내 얼굴도 기억 못 하시는 모교 교수님들께 우격다짐 식으로 부탁드려 받아낸 추천서, 지금 다시 보면 무슨 뇌내 망상을 이리도 길게 썼지 싶은 자기소개서. 이 스펙으로 미국 명문대를 졸업하신 글로벌 엘리트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미국 대학의 박사과정에 합격하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미국에 지원한 10군데의 학교에 모두 불합격하고 영국 런던에 있는 이 학교의 석사과정에만 합격했다. 이 곳에서는 석사과정에서 일정 성적(Distinction) 이상을 받아야만 박사과정에 잔류할 수 있었고 그게 안 될 경우 영국 내의 다른 학교를 알아봐야 했다.
요컨대 나는 내가 영국에 공부하러 올 거라고는 유학 나오기 1년 전까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건대 영국에서 공부하는 게 미국에 비해 장점도 있었고(원래 '많았고'라고 썼으나 런던에서 6년 동안 살면서 내야 했던 집세가 갑자기 생각나는 바람에 '있었고'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학문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존경하는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만나 무사히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저 얘기를 하고 나서도 모임의 분위기에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내 존재의 미미함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일 수도 있고 단순히 그 날 모임에는 경제학 박사과정 진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평소에 거룩하고 엄숙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내 대답에 혼자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내가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한테 재미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이렇게 반쯤은 외부 압력에 의해 시작한 영국 유학은 무려 6년 가까이 지속되며 내 인생과 사고방식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 표지 사진 출처: https://www.visitlondon.com/things-to-do/visiting-london-for-the-first-time/where-is-lond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