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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 Feb 25. 2024

헛스윙일지라도

다시, 파리에서 구직



3개월간의 침잠 후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파리에서 테크니컬 한 데이터 분야로의 재취업을 마음먹은 지 열흘이 지난 2023년 4월 초, 조금 다이내믹한 일이 있었다. 링크드인 인메일로 헤드헌터분께 메시지가 왔다. 평소에 생각해보지도 않던 에너지 대기업 + 데이터 사이언스 조합이었고, 유럽 및 미국 시장의 전기 소비 및 생산량을 실시간으로 정밀하게 예측하는 모델링 툴을 개발하는 업무였다. 근데 이건 한국에서 참여했던 주요 프로젝트와 거의 똑같아서 비록 불어로 메시지가 왔지만 면접이라도 한번 봐야겠다! 생각하고 먼저 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한테 용기 내어 연락을 했다. 친구랑 20분 정도 통화하면서 '이런 포지션 1차 면접이 있는데, 이 팀을 아는지, 혹시 알고 있으면 괜찮은 팀인지,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물어봤다. 



친구 : "실시간 에너지 트레이딩 R&D 부서인데 시간 단위, 분 단위로 정밀하게 전기 수요를 예측하는 internal forecasting tool을 개발하고 있다. 결국 전기 가격 비딩을 더 정밀하게 하기 위함이다. 매우 좋은 팀이고 배울 점이 많을 거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


나 : "고맙다. 너의 응원이 힘이 된다. 사실 불어로 첫 면접이라 별 기대는 없지만, 시도라도 해봐야겠다."


친구 : "파리 오피스는 모르겠는데 여기 제네바는 공식 업무 언어가 영어다. 잃을 거 없으니까 그냥 봐봐!"






밤새 부랴부랴 불어 스크립트를 준비하고 예정대로 30분 면접을 봤다. 처음에는 불어로 대화하다가 설명이 좀 막히는 부분에서는 영어로도 그냥 얘기했다. 최근에 불어 오프라인 밋업 갔던 게 도움이 되었다! 작년에는 불어 면접 봤을 때 상대방이 뭐라고 말하는지 이해를 못 했던 적이 꽤 많았는데, 적어도 이번에는 속사포처럼 헤드헌터 분이 불어 랩을 하셔도 90%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말하기는 아직 서툴러서 얘기를 하다가 막히면 영어로 얘기했는데, 여기서 반전 - "영어가 더 편함? 그럼 영어로 대화해도 된다. 사실 이 포지션 매니저들이 불어를 아예 못한다."


?!


그래도 불어 스크립트 준비했으니까 상대방은 불어에서 영어로 스위치 하고, 나는 최대한 불어로 말하는 이상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력서를 뾰족하게 다듬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을 이것저것 다 넣을 게 아니라 덜어내야겠다. 이하 헤드헌터의 속사포 질문들 :



포지션은 Data Scientist인데 절반만 모델링, 주요한 절반은 개발 업무다. 엔지니어링도 할 수 있겠냐         

AWS 쓸 수 있냐

한국에서도 데이터 사이언스 일을 했는데 왜 프랑스로 굳이 공부를 하러 온 거냐

최근 회사를 그만둔 이유는?

파리, 제네바 중 어디에서 일하고 싶냐

레주메 조언을 주자면, 프로젝트 별로 구체적인 functionality 및 tech stack을 기술해야 한다. 이 부분 수정해서 다시 레주메 보내달라.





불어로 메시지가 오더라도 그냥 보길 잘했다. 외부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컨설팅 회사가 아닌 이상, 이제는 조금씩 가능성이 보인다. 31번째 계단에 이르려면 1~30번 계단까지 밟아나가야 하는데 한 번에 31번으로 점프하려는 건 욕심이다. 설사 떨어진다고 해도 지금껏 뭐가 문제였는지 실마리를 잡았다. 일관성 없는 경험들을 전부 다 레주메에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고, 연관된 이력만을 선별해서 자세하게 기술할 것.



친구에게 용기 내어 물어보길 잘했다. 왜 이 플젝을 하려는지 덕분에 맥락을 알게 되었고, 도움이 되었다. 지금 당장 데이터 엔지니어로 지원하기에는 이력이 안 그래도 산만한데 더 산만해진다. 그렇다고 아예 쓸데가 없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Data Scientist 직무에 + 엔지니어링 식으로 덧붙여서 포장을 해야지, 급 Data Engineer로 가는 건 시장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뭐. 도움이 안 되는 게 없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가시적인 결과가 안 나온다고 떄려치지 말고, 애초에 약속했던 연말까지는 꾸준히 관심 가는 data engineering, 불어 밋업, 테크 습득하면서 취준도 동시에 하자.          




경우의 수 다 따져보고 철저한 준비를 할수록 해야 할 것만 같은 목록들은 산더미처럼 늘어나고, 결국 마비되어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 60% 정도 준비되었다고 생각하면 일단 선 저지름 후 수습으로 간다. 가면서 채우는 게 맞는 것 같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꼭 좋은 걸까? 원하는 걸 이뤘는데 적성에 안 맞아서 더 괴로울 수도 있고, 이뤄지지 않아서 다른 길로 갔는데 생각보다 잘 맞아서 행복하게 성공할 수도 있겠지. 최선을 다했는 데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슬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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