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덧이 장난처럼 보이세요?

입덧 신호, 토악질은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었다.

by 은빛구슬

결혼 후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뱃속 저 아래에서부터 정수리 끝까지 타고 올랐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나도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온 전율인 동시에 이제는 회사일에서 해방되겠구나, 하는 홀가분함에 대한 전율이었다. 부모가 되는 신성한 일 앞에서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격정적으로 흥분한 것을 보면 나에게 회사란 어지간히도 다니기 싫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생명과 호흡을 맞춰야 하는 임신은 허가받은 휴가 같았다. 누구도 나의 게으름에 야단을 치거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드라마를 보다 잠이 들어도 뭐라는 사람이 없었고, 가까운 마트라도 가기 싫다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았다. 임산부는 잠이 많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몸을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여름의 늘어진 개팔자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며 행복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은 후 생각해보니 그 시절이 진정한 호시절이었다. 육아가 전쟁이라는 것은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깨달았으니...)


비록 드라마에서처럼 식사 자리에서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쳐나가는 스펙터클함으로 임신 사실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임신 소식은 신비로움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렇게 임신은 나에게 안온함과 힘을 안겨주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비스런 힘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에 임신이 축복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임신에는 입덧이라는 복병이 숨어있었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난 드라마에서 여자들이 임신 소식을 알릴 때 입에 손을 대고 '우웩'하며 토악질하는 것은 그저 임신을 자랑하려는 하나의 제스처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다. '우웩'은 단지 헛구역질, 흉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웩'은 진짜 '우웩'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입덧은 임신 초기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임신 사실을 알고 안락함을 좀 느끼려 할 때 그 이상한 기운은 스멀스멀 올라왔다.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시작된 입덧은 나의 일상을 바꾸어 놓았다. 아니, 일상생활 자체를 없앴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입덧이 시작된 후로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두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려 해도 비누 냄새가 거슬렸고, 이를 닦는 일은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칫솔이 조금이라도 혀를 눌러 목젖이 알아챌라치면 여지없이 우웩 이 시작되었다.

변기를 잡고 눈에서 눈물, 코에서 콧물이 나올 때까지 토악질을 해댔다. 얼굴이 빨개지고 온 몸에 힘이 다 빠지고 나서야 그 일은 끝이 났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웩의 서막이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도 음식 냄새로 인해 스멀스멀 그 기운을 다시 느껴야 했다. 그전에 화장실에서 온 힘을 다해 눈물, 콧물을 쏟고 나왔는데 그 이상한 기운은 목을 타고 또다시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다. 그러면 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튀어가서 우웩을 진짜 리얼하게 해야 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우웩은 점심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저녁에는 먹은 것이 없어 더 이상 나올 것도 없겠지 싶은데 메스꺼운 속은 노란 물이라도 토해내게 했다.


외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마스크로 냄새를 차단하고 마트라도 갈라치면 화장실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외출은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난 죄수가 아닌 죄수가 되어 집에 갇혔다. 아이를 위해 무엇인가를 먹어야 하는데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 되었다.

친구가 자기 입덧 때는 오이를 먹고 나아졌다고 해서 오이를 좀 먹었는데, 나중에는 오이에도 비린내가 있다는 사실만 깨달은 채 오이와도 이별을 했다.


이렇듯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데 배는 계속 불러왔다. 의사 선생님께선 7~8개월이면 입덧이 없어지니 그때가 되면 먹고 싶은 것은 맘껏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7~8개월은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우웩이와 한 몸이었고, 빈혈 때문에 먹은 철분제(물로 된 철분제로 효과는 빠른데 이것 역시 비릿한 맛이 남)로 그 증세만 심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나를 살리려는 듯 나의 속을 달래 줄 음식이 등장했으니, 그것은 어머니께서 끓여주신 뜨끈한 식혜였다. 그 식혜는 해장국이 술 먹은 아저씨들의 속을 풀어주듯 나의 속을 풀어주었다. 그때나마 내 속은 편해졌고, 음식 섭취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울 딸이 식혜를 좋아한다. 그 아이 역시 뱃속에서 엄마가 식혜를 먹으며 느꼈던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


9개월을 지나 해산일이 가까워질 때까지 나의 우웩은 계속되었다.

나는 드라마의 그 여자들을 만만히 봤다. 그저 우웩 흉내 몇 번 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는 그녀들을 보고 나도 그럴 줄 알았기에.

그러나 나의 입덧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만을 안겨준 채 내 아이의 탄생과 더불어 비로소 작별을 고했다.


임신과 함께 알게 된 입덧의 기억, 그것은 신선한 아니 진정 잔혹한 충격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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