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 냉장고 속 음식이 넘쳐난다. 기름진 명절 음식이 위장의 한도를 초과해 니글거리기 시작하면 명절이어도 외식은 필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이라곤 쌀과 김치 반찬이 전부이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풍요는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당시 김치에 밥은 주식, 간장에 비빈 짭조름한 밥은 간식이었다. 어쨌거나 흰쌀만 줄구장창 먹고도 내 키는 168cm 언저리까지 자랐으니 가히 K밥심의 저력이라 하겠다. 그렇게 키가 훌쩍 크려 했는지 한창 성장기 시절 나는 늘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래 봤자 또 밥 밖에 없으니 하루 대여섯 끼는 족히 먹어 치웠다. 그 시절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이 쌀독에 쌀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하니 이해가 된다.
지금은 바나나가 흔하지만 당시 바나나는 물 건너온 과일 중 으뜸으로 실제로 보기 힘든 그저 책에서 그림으로나 볼 만한 귀한 과일이었다. 책에 그려진 바나나를 보면 과일 껍질이 노란색인 것도 신기했고 껍질을 벗기면 나오는 과육의 색이 흰색인 것도 참 신기했다. 그렇게 바나나는 내 침샘을 자극하는 무한한 상상 속의 신비한 과일이었다. 내가 바나나를 실물로 처음 영접한 건 국민학교 5학년 시절이었다. 우연히 길을 가던 중 건너편에서 부잣집 아들로 통하던 같은 반 남자아이가 한 손에 바나나를 움켜쥐고 한입 한입 베어 먹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가 바나나를 그림이 아닌 실제로 처음 본 것이었다. 바나나 맛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지만 자존심상 물어볼 엄두를 못 내고 오물거리던 친구의 입만 곁눈질로 슬쩍슬쩍 훔쳐봤다.
그렇게 과일에 맺힌 한은 어린 시절 일기장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일기장 속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바나나. 파인애플. 사과. 수박. 참외. 딸기가 가득 들어있었다. 블라블라~~~~) 당시 방학 숙제로 내준 일기였고 개학 전날 벼락치기로 꾸며 쓴 일기였다. 사실 일기라긴 보단 과일을 맘껏 먹어 보고픈 내 혀끝의 바람을 담은 소설에 가까웠다.(당시는 꼭 방학 숙제로 일기가 있었다)
늘 허기가 졌던 나는 어쩌다 할머니 집에서 엄마가 엿이나 건빵. 과일 같은 달디 단 간식을 가져오면 너무 맛있어서 눈이 홱 돌아갔고 게눈 감추듯 금세 해치우곤 했다. 더불어 평소 배불리 먹지 못하니 어쩌다 기름진 음식이나 달달한 간식을 먹을 기회가 생기면 언제 또 먹을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앉은자리에서 몽땅 먹어치우는 무지막지한 식습관이 생겨버렸다. 그 덕에 내 오래된 애착 반려 뱃살과 음식에 대한 식탐도 발아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지금은 먹고 싶은 음식이나 과일. 또 부르주아의 상징이던 간식(디저트)까지 언제든 사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지만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 그중 식습관은 평생에 걸쳐 바꾸기 힘든데 어린 시절 음식에 대한 갈망의 기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테다. 이제는 또 언제 먹을지 몰라 지방으로 내 몸에 비축해 둘 필요가 없음에도 내 식탐은 참 끈질기고 한결같이 꾸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