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위 비내력 벽으로서의 인생의 역사

by 가소로

기차에서 인생의 역사라는 책을 펴 들었을때 나는 건축이었다 말하고 싶다. 책을 들었다는 것은 벽을 세우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선 책은 나와 마주앉은 미국 아저씨와의 시선을 가로막아 차단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꽤나 넓다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그러니까 고작 손바닥 크기의 책이었지만 나름대로 파티션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물론 지지대는 내 손바닥, 그래서 고정되지도 않고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함께 춤추는 가벽일 뿐이었지만 가벽도 벽이니까.


두번째로 책이 갖고 있는 벽으로서의 기능이라면, 나 책 읽고 있어요 건드리지 말아요 라고 대신 말해준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런점에서 책은 벽인 동시에 벽에 설치된 확성기 스피커이기도 한 셈이다. 스피커 설치하는 일 따위가 어찌하여 건축이냐 묻는다면 나는 건축은 건축이요 하고 답할 것이다. 말을 하는것은 분명 스피커이겠지만 얼핏보면 벽이 말하는 것이라 우겨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도 안되는 문장이라고, 얼핏봐서 그럴듯한 것이 정말로 그렇다고 우기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한다면 나는 여기에 있다고 또 우겨볼지 모른다.


혹은 벽이 말을 하는 것은 말이 안되고, 스피커가 말을 한다 하는 것은 말이 되는거냐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기정 사실인듯 끼워넣어 넘긴 대목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스피커는 사람의 말을 확성시켜 출력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러니 스피커가 말을 한다는 것도 말이 안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사람이 말을 한다고 말하면 그것은 문제삼을 거리가 없으리라. 하지만 그것조차 정확히 따지고 들자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우리의 입술, 혀, 성대 등 구강 기관은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며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계 - 유기체적 기계와 다를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말을 하는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


뇌가 말을 한다고 하면, 왠지 그건 뉴럴링크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뇌는 언어를 조합해 문장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뇌가 말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라는 말에는 귀에 들리는 그런 말의 감각적인 측면도 꽤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 않나. 그렇게 보면 뇌가 말을 한다는 말도 조금은 결함이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결국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뇌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강 조직이 함께 협업하여 말을 한다고 보는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니 그렇다면 혀와 입술과 성대와 입천장 등의 신체 기관과 스피커의 차이가 명확한가? 불처럼 그렇게 명확한가? 우리의 신체의 일부도 결국은 기계처럼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스피커라고 해서 우리 성대의 연장으로서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로 크게 말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치면 되지만, 육성의 한계를 넘어서 말하기 위해서는 역시 스피커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먼곳까지 들리도록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공간상의 한계를 넘어서 시간상의 한계역시 뛰어넘어 말하기 위해서는 스피커가 필요하다.


어쩌다 말하기의 공간적 한계 뿐 아니라 시간적 한계까지 운운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스피커도 '말을 한다'는 사건의 일부를 차지하는 조각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제 말같지 않은 말이라는 소재를 폴짝 뛰어넘어 건축의 중요 구성 요소로서의 벽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 벽에 스피커가 달려서 소리가 퍼져 나온다. 만약에 벽 저 높이 달린 스피커가 벽이 무너져 함께 푹 고꾸라진다면 어떨까. 소리는 벽 저 높이 달려있던 그 시점보다 멀리 퍼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더 먼곳까지, 더 먼 시간까지 말소리를 닿게하는 스피커로서의 본질적 역할 또한 벽과 함게 무너질 것이다.


그렇다면 멀리멀리 말하기에 있어서 벽이 담당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벽도 말을 한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먼길을 왔지만 내가 하려는 말은 이게 아니었다. 그래, 그럴때도 있지 않나. 열심히 달려왔는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막다른 벽이라. 하지만 벽은 건축에 있어서의 시작이기도 하지않나. 더군다나 나로서는 벽 그 자체가 아니라, 벽으로서의 책 - 그게 원래 내가 말하려는 주제 아니였나.


벽도 말을 한다. 내가 기차에서 펼쳐들었던 '인생의 역사'라는 책은 벽과 다름 없었다. 물리적 칸막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마주앉은 상대방에게 나 독서 중이니 방해 말라고 말해준다는 점에서, 책은 곧 벽이다. 그러니까 책도 말을 한다. 다만 책은 들리지 않게 말을 건넨다. 그 후덕한 외모의 미국인 아저씨에게 내가 펼쳐든 책은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말했을 것이다. 당신과 나는 사용하는 언어 역시 다릅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 사이에는 세번째 벽이 세워진 셈입니다. 물리적 파티션으로서의 벽. 독서 중이라는 신호로서의 벽. 끝으로 언어의 장벽이라고 하는 바로 그 장벽.


가당찮은 말장난처럼 들리겠지만 생각해보면 벽을 세운다는 건축적인 행위는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이미 일어나는 중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수백 수천개의 벽이 세워지고 또 무너졌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수도없이 다양한 형태와 성격의 벽들을 자신도 모르게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역사라는 책 한권이 샌디에고행 기차 위에서 벽이었던만큼, 딱 그만큼은 건축과 무관한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건축인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일단 인생의 역사라는 책벽을 지어 올리고 나자 나는 한결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졌다. 아저씨의 두 아이들이 사랑스럽게도 조용조용 춤을 추면서 노는 모습을 바라보기에도 좋았고, 어느정도 몸을 굽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도 한결 편했다. 비내력 책벽을 구축하기 전까지는 몸을 수그려 창문에 다가간다는 것 자체가, 마주앉은 이와의 거리를 좁힌다는 의미이기도 했기 때문에 편치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순간 샌디에고에 도착할때까지 끝나지 않을 대화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부담이 상당했던 것이다.


굳건하게 세워진 벽이 수년에 걸쳐 바람을 막아주고, 비를 막아주고, 한기를 막아주고, 소리를 막아주고, 어디서 날아오는 돌덩이를 막아주고, 빛을 막아주고, 냄새를 막아주듯이, 그리 굳건하지 않은 벽은 또 굳건하지 않은 정도만으로 막아낼 수 있는 것들을 잠깐이나마 막아준다는 점에서, 역시 책은 다시 한번 벽이다. 세 시간의 기차안 여정에서 맞은편 아저씨의 눈길을 막아줬고 (사실 그리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원치않게 길어질지 모르는 대화의 습격을 막아줬고, 좀더 근본적으로 지레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나 자신의 심리적 노동 역시 막아준 벽이다.


한시간이나 지연되어 출발한 기차를 기다리는 중에 인생의 역사를 꺼내들었다면 책은 기다리는 지루함 역시 막아주는 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가방 속에는 초코빵과 먹다남은 매콤한 치킨 텐더 한조각이 있었다. 아침을 거르고 나온탓에 허겁지겁 먹다보니 기다림도 금방이었다. 그렇게 보면 빵도 벽이고 치킨 텐더도 벽 아닌가 하겠지만 상상해보면 알 수 있다. 아저씨와 마주앉은 그 자리에서 초코빵을 눈앞에 펼쳐들었다면. 튀김가루 우수수 떨어지는 치킨텐더를 포크로 찍어 얼굴앞에 들어올렸다면. 벽으로 세우기에 어색한 것들, 억지로 세운다해도 금세 무너져야 할 - 무너뜨릴 수 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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