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민 무용수가 지난달 23일 전화 인터뷰에서 언급한 콘텐트 일부다. 각각 1821년생 작가부터 1841년생 작곡가, 1999년 시작된 애니메이션부터 2023년 화제의 예능 방송. 장르와 시대, 결이 선명하게 다르다. 내로라하는 마린스키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인 그가 시간을 쪼개어 이렇게나 다양한 작품을 흡수하는 이유는 뭘까. 지난달 24일 통화 중 그의 말을 옮긴다.
"관객께 제가 드리고 싶은 선물이 있거든요. 그걸 만들어 내기엔 지금 저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요. 다양한 작품과 감정을 접하는 건 그 부족함을 채우고 싶어서예요.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예술로 익혀가는 능력을 키우고 싶습니다."
관객뿐 아니라 발레단 안팎에서 찬사를 받는 무용수의 "부족하다"는 말. 진지하기 그지없는, 순도 100%인 진심이 녹아있다. 장르 불문 다양한 작품과 감정을 받아들여 체화하고 자신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싶다는 의지는 강철 같다.
어찌 보면, 김기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어가는 중이다. 희로애락, 비극과 희극, 희망과 절망,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장르.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수단을 단련해 관객에게 예술이라는 선물을 건네주고 싶다는 열망. 김기민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무대 밖의 그에겐 특유의 묵묵한 차분함이 있다.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위해 어떤 일도 각오하고 있는 일종의 구도자가 갖는 의연한 종류의 차분함이다. 그리고 그의 목표는 하나. 발레라는 궁극의 아름다움.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테크닉과 경험을 쌓아온 노력의 과정을 지났기에 지금 무대의 제가 있으니까요. 저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싶어요. 그게 저 자신에겐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관객에겐 (표현력이 풍부해지니) 좋은 일이죠.” ( 기사 원문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95130 )
김기민이라는 장르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내 전성기는, 내가 정한다
김기민이라는 무용수를 2회 시리즈로 다루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김기민이라는 장르, 그라는 무용수를 이해하려면 몇 가지 키워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형(국립발레단 김기완 수석무용수)과의 우정, 마흔을 향한 각오, 연습 등등. 이 글만으로 김기민이라는 장르를 완벽히 설명할 순 없지만, 적어도 2023년의 김기민에 대한 안내서 역할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언젠가 그에 대한 더 깊은 글을 쓸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기자로서 그와 면대면 인터뷰를 진행한 건 지난해, 2022년 8월 16일. 러시아에서 귀국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오전 11시 약속 시간에 맞춰 한국예술종합학교 연습실의 문을 열자 그는 먼저 도착한 사진기자 선배와 촬영 구도를 상의 중이었다. 발레가 아직은 낯선 사진기자 선배에게 그는 "이건 어떨까요" "이런 것도 있어요" "이 포즈는 사진에 예쁘게 잘 잡히더라고요"라며 다양한 포즈를 제안했다. 점프를 뛰려는 그에게 "장거리 비행 다음날인데 몸 더 풀고 하셔도 좋아요"라고 만류하자, 그의 답.
"아, 괜찮아요, 이미 했어요."
알고 보니 이미 그는 몇 시간 전에 연습실에 도착, 아침 운동 루틴과 바워크까지 마쳤던 것. 그의 얼굴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기사엔 다 담지 못했던, 루틴 관련 문답.
Q=아침마다 운동을 하시는 거예요? 365일 매일이요? A=네. 전날 아무리 힘들었어도, 늦잠을 잤어도, 장거리 비행을 했어도 꼭 해요. 그냥... 저와의 약속이에요. 춤을 오래 추고 싶으니까요. 그럼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해요."
Q=언제부터 하셨고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A=2년 전부터요. 무슨 일이 있어도 모닝 운동 루틴을 지키자고 마음먹었어요. 발레 그만두는 날까지 계속하려고 해요.
Q=와우. 힘들 텐데요. A=힘들죠. 그래서 더 아침에 그냥 빨리 끝내려고 해요(웃음)."
Q=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김기민 무용수는 이미 정상에 있잖아요. A=저는... 전성기를 마흔으로 잡고 싶어요. 러시아에선 27세~35세를 대개 남자 무용수의 전성기로 잡거든요. 너무 어릴 땐 감정 표현이 부족할 수 있고,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체력이 문제가 되니까요. 제가 마흔을 전성기로 만들기 위해선 노력을 해야죠.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김기민 무용수는 1992년 생, 올해 31세다. 전성기까지 남은 9년도, 그 이후도 기대한다.
안 좋은 운동은, 없다
지난달 24일 통화를 앞두고, 궁금했다. 여전히 계속하고 있을까. 답은? 말해뭐해. YES.
지난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김기민이 이렇게 하는데, 내가 뭐라고 안 하나. 이번 통화에선 조금이나마 시작한 뒤 겪었던 어려움과, 독자들도 루틴 얘기에 감명받았다는 반응들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에 그에 대한 답을 전한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살짝 한 옥타브 올라갔다.
"와,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정말 기쁜데요. 솔직히 저는 정해진 패턴으로 루틴을 하진 않아요. 안 좋은 운동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그냥 팔을 위아래로 들었다 내렸다 하는 것도 좋은 팔 근육 운동이에요. 모든 운동은 내가 어떤 목적을 갖고 하는지에 따라 효과가 달라지니까요. 저희는 운동을 통해 근육을 보이려는 게 목적은 아니고, 전체적인 아름다운 몸을 만들어 관객에게 표현력을 드리기 위해 운동을 해야죠. 무용에 필요한 운동을 구상합니다. 그날 일어나서 제게 그 시점에 필요한 효과를 위한 운동이 뭔지를 생각해서 해요. 계속 바꾸는 거죠. 물론 같은 패턴을 지속할 때도 있고요. 변하지 않는 건 있어요. 계속하는 겁니다. 좋든 싫든 하루에 꼭 하는 거요."
역시, 구도자다운 면모다. 사실 무용수들이 모두 이런 루틴을 하지는 않을 터. 하물며 몸도 마음도 굳은 성인 취미발레인들이 계속할 수 있을까. 침울해졌다. 그때, 그가 내밀어준 반가운 다음 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한 가지 팁을 드릴게요. 솔직히 운동을 뭘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아요. 특정 운동만 권하기엔, 운동이라는 게 너무 광범위하죠. 중요한 건 꾸준히 계속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점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꾸준함이 제일 어려운 거 아니냐고. "(웃으며) 네, 제일 어렵긴 하죠. 저는 솔직히 직업이니 해요(웃음). 직업이어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사실, 팁은 이겁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적은 숫자로 시작하시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오늘부터 루틴을 시작하는데 1시간을 무조건 하겠다면, 오히려 어려워요. 1주일 내내 그렇게 하긴 어렵다는 거죠. 차라리 1분만 해보자, 이렇게 시작해서 내일은 2분, 모레는 3분, 이렇게 늘려가는 거죠. 그럼 이건 힘듦의 문제가 아니라 귀찮음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 귀찮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게 1년을 하면 평생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일종의 명상이 되는 거죠. 어찌 보면 몸을 운동시키는 걸 넘어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기도 해요. 계속한다면 굉장히 자신감이 생기실 겁니다."
자신감이 마구 솟아오르지 않는가. 실은 나도 그에게 영감을 받아 인터뷰 이후부터 아침에 딱 10분씩 루틴을 해왔다. 발레학원의 수많은 훌륭한 선생님들(장여름 선생님, 오연주 선생님, 조성은 선생님, 김현우 원장님, 최시몬 선생님 등등 감사해요!)께 조언을 구했고, 클래스에서 내게 특히 효과 있었던(즉, 제일 못하고, 하기 싫은) 운동을 조금씩 해왔다. 그렇게 1년 3개월이 되니, 이젠 아침에 루틴을 안 하면 몸이 아프다.
자,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응원을 보내며 1회는 마무리. 2회도 놓칠 수 없는 내용이 가득하다. 김기민 무용수에게 소중한 존재인 형과의 이야기, 내년 서울 '발레 수프림 2024' 공연, 성인 취미발레에 대한 김기민 무용수의 생각.
퀴즈로 마무리. 김기민 무용수가 성인 취미발레인들에게 "여러분들은 저의 O"이라고 했다. 이 한 글자는 뭘까. 댓글로 정답을 적어주시는 분들께 작은 선물이 있을 수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