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볼 터치 좀 해 주라

볼빨간 사춘기 아니고 볼빨간 오춘기

by 연쇄도전러 수찌

혼자 여행할 때는 매일 화장할 필요가 없었다. 아침마다 ‘썬크림-베이스-파운데이션-파우더’를 공들여 깔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도 했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 곳들이었다. 엄마 모시고 온 여행길은 달랐다. 매일, 아니 매 순간 사진 찍을 일이 많다. 그건 엄마 희망인 동시에 내 의지이기도 했다. 엄마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나라. 가능한 한 곳곳에서 사진을 많이 남겨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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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의 아침은 매번 분주했다. 엄마와 나 둘 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다. 머리가 더 긴 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어깨를 한 뼘 넘어가는 갈색 커튼 같은 머리 덩이는 한참 말렸는데도 아직도 완전히 마르려면 멀었다. 샤워를 마친 엄마가 화장대로 다가와 먼저 머리를 말리겠다고 했다. 단발머리인 엄마가 머리 말리는 동안 화장을 시작한다. 집에서부터 싸 온 가진 모든 화장품으로 ‘풀 메이크업’을 한다. 일상에서는 잘 그리지도 않는 아이라인을 꼼꼼하게 그리고 마스카라로 속눈썹까지 바짝 올린다. 눈이 1mm라도 더 커 보이기를 바라며. 슬쩍 옆을 보면 엄마도 마찬가지다. 눈썹이 혹시나 짝짝이 될세라 아이브로우 연필을 덧칠하고 지우고 다시 그린다. 엄마는 보랏빛 아이섀도를 좋아한다. 내 눈엔 보라색 눈두덩이가 조금 나이 들어 보여 그 색은 그만 바르라고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보라색 발라야 눈이 그윽해 보인다고.”

주관적 미의 기준을 인정하는 수밖에. 어쨌든 우리는 각자 오랜만에 맞은 휴가에 걸맞은 얼굴을 꾸미기 위해 매일 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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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화장의 마침표는 볼 터치. 얼굴이 긴 편이다, 볼 터치로 꼭 중안면부에 색을 넣어 시선을 끊어줘야 나을 거라고 어딘가에서 봤다. 물 먹인 듯 자연스레 얼굴빛 밝혀준다는 블러셔로 볼에 색을 칠하고 있었다. 너무 과하면 광대 같은 느낌이 나고 너무 덜 칠하면 보이지도 않는다. 한 부분에 가루가 많이 묻지 않게 손에 힘은 빼고 골고루 나누어 색을 쌓는 정교한 작업. 집중해서 볼을 톡톡톡 두드리는데 엄마가 묻는다.

“엄마도 볼 터치 좀 해주면 안 되니?”

“엄마가 볼 터치 한다고? 이 분홍색 바를 거야?”

“응, 네 얼굴에 그거 바르니까 훨씬 생기있어 보인다. 엄마도 좀 해줘 봐.”

엄마 나름의 풀 메이크업을 마친 얼굴에 내 블러셔를 살살 얹는다. 엄마 얼굴 역시 과유불급 원칙에 따라 보일 듯 안보일 듯, 하지만 바르기 전과는 다르게 적당히 토닥였다.

“에구 보이지도 않는다. 조금 더 칠해봐.”

“이거 너무 많이 칠하면 웃긴단 말이야. 적당히 발라야 해.”

“이러면 사진에 나오지도 않아. 쪼~금만 더 칠해봐.”

“안 되는데…….”

두 뺨에 분홍빛이 쨍하게 올라온 경숙 씨가 OK 사인을 보냈다.

“이거 봐. 훨씬 어려 보이잖아!”

“그렇긴 하네. 근데 엄마는 볼 터치 없어?”


엄마 파우치를 들여다봤다. 비비 크림은 내가 집에 두고 간 것. 보라색, 금색 아이섀도는 언제부터 썼는지 알 수가 없는 지경. 도넛처럼 용기 가장자리로 섀도가 남아있긴 하다만 사실 제 몫은 진작 다 한 것 같다. 파우더도 저걸 대체 언제부터 보던 건지 모르겠고 립스틱도 오래되어 버려야 할 것 같다.

‘이번에 립스틱이라도 두 개 새로 사드려 다행이지.’


그 옆에 펼쳐진 내 화장품 파우치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딸은 취업하고 이제 파운데이션은 백화점 것으로 업그레이드했는데. 색조 화장품도 이제 로드 샵 것은 안 쓴 지 오래되었는데……. 엄마는 아직도 내가 집 떠날 때 그대로다.

‘저렇게 꾸미는 걸 좋아하는데…….’


용돈 쥐여 드려도 엄마 혼자 백화점 파운데이션 사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화장품 회사가 얼마나 많으며 한 회사에서도 어찌나 다양한 화장품이 나오는가. 파운데이션 하나만 해도 유분기와 색조에 따라 회사마다 종류가 너무나 많다. 피부에 맞는 제품 고르기. 젊은 딸도 어려웠다. 이럴 때 보면 희한하다. 엄마 딸이 맞긴 한가보다. 내 얼굴에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온 립스틱이 엄마 입술에도 딱 맞다. 파운데이션도 마찬가지겠지? 돌아가면 내가 쓰는 제품으로 엄마 집에도 하나 보내줘야겠다. 파운데이션도, 볼 터치도.


같은 볼 터치를 바르고 같은 고데기로 앞머리를 봉긋하게 띄운 모녀. 오늘은 파타야 거리를 구경할 계획이다. 파타야는 아주 오래된 휴양지 겸 향락의 도시다. 바다가 보고 싶어 파타야를 굳이 계획에 끼우긴 했지만, 유흥가 색채가 너무 짙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파타야에 엄마와 딸이 즐길 거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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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유흥’을 빼도 파타야에 할 것이 많았다. 우리는 낮에 해변 맥도날드에 갔다. 태국 맥도날드 특산품(?)인 콘 파이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물 맑진 않지만, 야자수가 멋들어진 파타야 해변을 걸었다. 내일을 기약하며 얕게 밀려드는 파도에 발만 살짝 담그기도 했다. 다시 신발 신기 위해 발을 말려야 했다. 모래사장에 철퍼덕 주저앉아, 두 팔을 뒤로 기댄 채 반쯤 누웠다. 젖은 발을 하늘 방향으로 들어 상하좌우로 다 마를 때까지 흔들었다. 각자 챙겨온 밀짚모자를 쓰고 낮게 내려온 오후 태양광 받아 사진도 찍어야 했다. 그래야 오늘 열심히 얼굴에 그림 그린 보람이 있을 테니까. 커다란 코코넛 나무와 파도는 충분히 이국적인 배경이 되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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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숯불에 해산물을 구워 먹는 식당엘 갔다. 엄마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며, 새우 같은 건 많이 먹지 말라고 병원에서 한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숯불에 구운 조개, 새우, 게의 풍미는 참을 수가 없다. 모녀는 입맛도 비슷해서 나나 엄마나 갑각류라면 환장한다.

“오늘만 먹자!”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와 물기가 송골송골 맺힌 맥주를 맥주잔에 따른다. 꿀꺽꿀꺽 갈증을 씻기고 숯불에 구운 두툼한 게살을 입에 꽉 차도록 베어 문다. 게는 쪄먹거나 삶아 먹는 줄로만 알았다. 직화로 구워 먹는 게가 이리도 맛날 줄이야! 손끝과 입 근처가 재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운 새우와 게를 열심히 발라먹었다.

“누가 닮아서 게를 저렇게 좋아한담?”

“누가 닮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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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기운이 알딸딸하고 고소한 게로 배도 든든히 채웠다. 이대로 숙소 들어가기 아쉽다. 밤이 되어야 살아난다는 파타야 유흥가. 엄마랑 그 거리를 가도 될까 싶어 내심 망설였다.

“엄마, 파타야는 밤에 영업하는 유흥가가 유명하대. 근데 좀 우리 둘이 가기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뭐가 어때. 그런 것도 구경해야지. 가자 가!”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향락의 거리로 향한다.

‘이런 기분에 오토바이 타는구먼?’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토바이 뒷자리에 쪼롬히 앉아 도로 위 무법자가 된 듯한 기분만 만끽했다. 순진한 척하던 낮 파타야와 본색을 드러낸 밤 파타야는 완전히 달랐다. 낮에는 다들 잠들어있던 것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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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바닥부터 머리 위까지 조명으로 번쩍인다. 빠르게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며 지나가는 사람 눈길을 사로잡으려 노력하는 불빛. 여자 둘 걷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들어오라며 손 내미는 태국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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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건물 유리창 안에서 주요부위만 겨우 가리고 굴곡진 몸으로 유혹하는 서양 언니. 빠짝 마른 태국 여자를 양옆에 끼고 어깨 혹은 더 아래를 주무르며 걸어가는 서양인 아저씨. 과연 여기 우리가 있어도 되는지 머쓱한 기분이 들어 엄마 눈치를 계속 살폈다. 엄마는 이 자체가 신기하고 신나는 모양. 시끄러운 음악 소리 들리는 클럽 앞. 엄마가 더 적극적이다.

“우리도 오늘 한번 흔들까?”

“안돼. 저기 가면 저런 언니들이 막 만진다고.”

아직 엄마와 같이 클럽 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개중에 적당히 신나고 적당히 퇴폐적으로 보이는 술집에서 맥주 한 잔씩을 더 걸쳤다. 오늘 우리는 화장도 비슷하게 하고 친구처럼 같이 클럽도 같이 갈 뻔했다. 우리 엄마, 아직 마음만은 청춘이더라. 분홍빛으로 볼 터치도 하고 싶고, 쿵쾅거리는 음악이 나오면 마음이 들썩이고. 볼빨간사춘기는 아니지만 볼빨간 오춘기는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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