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항상 진심이 넘쳐나는 당신들의 사랑을 응원하며.
작년 여름, 친한 동생 K는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와 전화할 때면 늘 애교 섞인 하이톤의 목소리로 "우리 언니! 뭐 하고 있었어요?"라고 묻는 K였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가 들어본 K의 목소리 중에 가장 저음이었고 힘이 하나도 없는 채로 "언니.. 바빠요?"라고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생긴 것을 직감한 나는 하던 일은 중단하고 K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K의 회사 생활이 힘들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큰 사건이 그녀에게 생겼었다. K의 연인이 K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반년 동안이나.
당연히 연인 사이에서 바람은 피우는 행위는 두 말할 필요 없이 잘못된 행동이고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다. 하지만 K의 이야기를 듣고 내가 더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따로 있다. K는 이 일을 겪기 얼마 전에 다른 친구에게도 배신을 당했었기 때문이다.
한 숨을 깊게 쉬고 K는 내게 말했다.
"언니. 아무래도 제가 문제인가 봐요. 자꾸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보면.. 예전부터 언니가 저한테 그랬잖아요. 사람이 좋아질 때 너무 다 퍼주지 말라고, 너무 마음을 다 보여주지 말라고. 그때는 몰랐는데 언니 말이 맞나 봐. 너무 내가 과했나 봐요."
사실 나는 K를 오래전부터 걱정해왔었다. K는 친구로든 연인으로든 어떤 사람이 좋아지면 그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모두 다 보여주고, 표현을 다 하는 스타일이다. 때로는 과할 정도로.
10여 년 전, 우리가 친해질 무렵 그녀는 내게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나에게 잘해줬었다. 나를 좋아했던 남자 사람들 그 이상으로 말과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K의 이런 행동이 처음에는 의심스럽고 불편했다. 하지만 K라는 사람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결국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끈끈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 이후로 옆에서 K가 연애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K의 솔직하고 적극적인 그녀의 성격을 부러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K의 이런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을까 봐 걱정이 됐었다. 그래서 나는 K에게 자주 이야기했었다. '알아가는 과정에서 너무 너의 감정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다고, 그리고 그 감정을 굳이 과하게 표현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지금이야 네 곁에 좋은 사람들이 많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그런 너의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 네 마음의 문단속을 조금 더 잘했으면 좋겠다고.'
그때마다 K는 내게 당당하게 말했었다.
"언니, 나는 이게 좋아요. 내 마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거. 내가 좋아하는데 어떻게? 표현해야지. 나는 언니처럼 참고, 아끼고 그러다가 병날지도 몰라요. 나중에 상처를 받아도 저는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할래요."
K의 말이 사실은 다 맞다. 나도 K에게 말로는 '마음을 보여주지 말라고, 다 퍼주지 말라고'했지만 사실 K의 그런 면을 닮고 싶었고 또 좋아했다. 나처럼 마음을 숨기고, 아끼는 겁쟁이가 보기에는 K가 훨씬 더 용감하고,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K가 내게 힘이 싹 빠진 목소리로 "언니 말이 맞았나 봐."라고 했을 때, 내 가슴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속으로는 내가 틀리기를, K처럼 온전히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온전히 사랑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K의 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조만간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갈게. 네가 좋아하는 갈매기살에 소주 한 잔 하자. 그동안 못 나눈 이야기 그때 다 나누자. 힘들어도 조금만 버티고 있어. 내가 갈 때까지. 힘들거나 답답할 때 언제든지 전화하고. 알겠지?"라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전화 통화가 마무리될 무렵, K는 대뜸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알겠어요. 언니.
근데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 때 제 사랑을 다 줬던 것 같아요.
그러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 본모습이 나오더라고요. 그게 연인이든, 친구든요.
그래서 언니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이런 일들을 겪고 나니까 지금까지 제 곁에 이렇게 남아준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더 빛나는 거 있죠.
지금 저 힘들긴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전화로 내 이야기 다 들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고, 그게 언니라는 게 참 다행이고 고마워요. 정말."
나는 K에게 더욱 고마웠다. 그리고 K가 더 빛이 났다.
K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을 떠난 사람과 자신이 받은 상처와 배신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곁에 있어준 사람들의 소중함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것만큼은 꼭 K가 알았으면 좋겠다.
K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K 스스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K는 앞으로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하고, 받을 수 있는 충분히 멋지고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오늘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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