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어른의 연애를 꿈꾸는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
2017년 3월 어느 날, 이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남녀 동료 여섯 명과 함께한 술자리에서였다. 하필이면 우리가 만났던 날 기준으로 딱 7일 전 이별을 겪고 온 한 명의 남자동료 덕분에 그날 우리 술자리의 메인 안주는 '연애'가 됐다. 그리고 조금 더 대화는 구체적으로 흘러 '과연 어떤 사람과 함께해야 다가올 30대의 성숙한 어른 연애를 가능하게 할 것 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그들은 "이런 여자 (남자)는 만나면 진짜 힘들어! 내가 만나봤는데..."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때였다. 남자 동료 S는 머릿속에 번뜩 어떤 기억이 떠올랐는지 목청을 높여 이렇게 말했다.
"아 그리고 쉽게 우울해지고 모든 걱정을 나한테 다 말하는 사람 만나면 진짜 힘들어..!"
그 말을 듣고 바로 입장 바꿔서 만약 남자 친구가 너무 자주 "나 우울해.. 힘들어.."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니 그 친구의 말이 쉽게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때 내 맞은편에 앉은 또 다른 남자 동료 L이 맞장구를 치며 "맞아! 무슨 일만 있으면 우울하다고 하고, 무슨 고민이든 다 나한테 이야기하는 사람 나도 만나봤어. 처음에는 그 친구가 마음이 여려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다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열심히 상담해줬는데 나중에는 나도 같이 힘 빠지고 우울해지는 거야. 그렇다고 티도 못 내고.. 내가 아무리 남자 친구지만 들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런 얘기 들어주는 거 얼마나 지치냐."라고 말했다.
지긋지긋한 피곤함이 느껴지는 L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도 옛 연인들에게 자주 우울하고 고민이 많은 여자 친구로 기억되지는 않았을까?' 잠시 동안 떠올려본 옛 기억 속 몇 명의 사람들에게 나는 아마도 '우울하지만 티 내려하지 않고, 고민은 절대 털어놓지 않는 여자 친구 (늘 혼자서 결정하는 여자 친구)'로 기억될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 같았다.
20대 초, 썸 같은 짧은 만남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연애다운 연애를 했던 나는 연애도 친구와의 관계를 유지하듯 행동하게 맞는 줄 알았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고민을 나누는 것을 물론이고 힘든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고 거의 들어주는 역할을 해왔던 나였기에 연애 상대인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했다. '오늘 학교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누가 나에게 뭐라고 했고, 그래서 기분이 안 좋다.'와 같은 작은 이야기는 더욱더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 남자 친구와 만난 지 1년이 막 지났을 때쯤 어느 날 화기애애하던 저녁 식사 자리였다.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는 갈매기살이 나란히 놓인 불판을 앞에 두고 소주를 사이 놓게 나눠 마시던 중 그는 "음..", "음.."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너는 왜 나한테 고민을 말하지 않아? 이번에 너 공부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는 것도 그렇고.. 힘든 일이 있어도, 걱정이 있어도 나한테 거의 말 안 하잖아.. 항상 너는 다 결정하고 나서, 그 일이 다 지나고 나서 말하는 것 같아. 가끔 그럴 때마다 내가 너한테 그만큼 믿음을 못 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좀 서운해지더라고.."
그 이야기를 처음 듣던 날, 그 순간에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가 나에 대해 이렇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의 이야기를 듣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발그레해진 두 볼을 숨기지 못한 채 곧바로 그에게 말했다. "어? 내가 그랬구나.. 그렇게 생각할 줄 정말 몰랐어. 내가 누구한테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고민을 나누고 이런 걸 많이 안 해봐서 그런지 생각도 못했던 것 같아. 미안해.. 근데 내가 왜 오빠를 못 믿어! 그런 거 아니야..! 서운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 앞으론 내가 꼭 오빠한테 먼저 말할게!"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소주잔을 들어 올렸고 나도 더욱 동그래진 광대를 뽐내며 소주잔을 부딪혔다. 그날 우리는 예상과 달리 여러 병의 소주를 단숨에 비워냈고, 마음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끈끈한 의리와 같은 감정이 가득 차올랐다.
그 후, 나는 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의 고민과 걱정을 함께 나누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그 대화의 끝에는 늘 한숨과 오해, 그리고 크고 작은 말다툼이 남았고 이내 나는 다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와의 모든 사랑이 끝난 후 다시 그 순간들을 돌아본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야 그때 나는 왜 그에게 나의 우울과 고민을 함께 나누지 못했는지 그 이유가 명확히 보인다. 슬프게도 그 사람이 내게 한 말이 맞았다.
"내가 너한테 그만큼 믿음을 못 줘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기보다 내가 나의 우울함, 힘든 일, 고민, 걱정을 나눌 만큼 그를 믿지 못했다. 단순히 '그 사람이 날 사랑하냐 안 하냐'와 같은 감정적인 믿음이 없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저 나는 내 삶 속의 어두운 부분과 내 삶에서의 큰 결정을 그와 나눌 만큼 나란 사람과 그란 사람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20대 초중반 그와의 연애 시작과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감정'이었다. 30대의 지금 내가 보기에는 참 무모했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연애일만큼 그와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가치관이 정말 달랐다. 그럼에도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20대의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고 감정적으로는 그를 여전히 좋아하면서도 보이고 싶지 않은, 보이지 않은 네 삶과 그 속의 나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3년 전 우울하다고 말하는 연인을 두면 힘들다고 말했던 S와 L도, 그들의 옛 연인들도. 그리고 왜 자신에게 힘든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고 말했던 오래전 나의 옛 연인도, 그 이야기를 듣고도 나의 삶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기 꺼려했던 나도. 우리 모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저 우리는 각자 모두 다른 '사람'이고,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마음이 하는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날들이 허다한데 그 누가 타인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다 내 이야기처럼 들어줄 수 있을까. 그걸 알면서도 내 이야기를 한다는 건 어쩌면 그만큼 상대를 내 삶 속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보여주고 나누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믿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자신도 몸과 마음이 피곤에 절었을지라도 끝까지 휴대폰을 붙잡고 그녀(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준다는 건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니 지금 현재 사랑을 하고 있지만 성숙한 연애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을 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다가올 어른의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알맞은 연애 상대를 찾기 이전에 먼저 명심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닐까.
"내 삶이 고단하고 서러웠다면 그 사람의 삶 또한 피곤하고 노여웠을 것이라는 것.
내가 그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위로를 듣기를 바랐다면 그 사람 또한 나의 입 밖으로 나오는 온기를 느끼고 싶어 했을 것이라는 것.
내가 내리기 힘든 결정 앞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그 사람 또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이라는 것.
내가 내 꿈을 아끼고 갈망하는 만큼 그 사람 또한 그 꿈이 애절하고 절박하다는 것.
내 삶이 소중하고 애틋한 만큼 그 사람의 삶 또한 그 누구의 삶보다도 소중하고 애틋하다는 것.
그런 삶에서 기꺼이 옆자리를 내어줬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대방은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믿고 있다는 것."
이것들을 먼저 머리로, 가슴으로 이해하고 상대에게 '표현'했을 때 우리가 꿈꾸는 성숙한 으른의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그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 이러한 생각과 표현은 누가 먼저 하냐는 연인 사이에서 중요하지 않지만, 누군가 먼저 한다면 그 노력을 알아주고 그에 대한 또 다른 노력과 표현이 함께 해야 정말 으른끼리 하는 연애가 지속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나도 아직 으른이 되려면 멀었....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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