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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면,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삶을 뒤흔든 찰나의 기적들》 13화

by 수미소

《내 삶을 뒤흔든 찰나의 기적들》13화.

집에 오면,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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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그 따뜻한 얼굴은, 포도밭 끝에도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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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면

가장 먼저 반겨주시던 분은 할머니였다.


마당 끝,

장독대 옆을 지나 마루를 밟는 순간이면

항상 들리던 목소리.


“왔나, 고생했다.”


그 말엔

밥보다 먼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어떤 위로보다 부드러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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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늘 그 자리에 계셨다.


마루 끝,

햇빛이 내려앉는 담벼락 아래

쪽을 지어 단정히 묶은 하얀 머리칼,

묵은 장과 햇살 냄새가 섞인 그 주변의 공기까지

모두 할머니 같았다.


바쁜 엄마를 대신해

우리의 하루를 가장 많이 지켜보신 분.

우리를 혼내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세상의 중심이 되어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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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인자한 미소는

지금도 내 기억 속 가장 따뜻한 장면이다.


특히 포도밭에서의 한 장면은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


한여름 볕 아래,

할머니는 늘 그늘을 찾아 나뭇가지 밑에 앉으셨고

그 옆에서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덜 익은 포도를 따기도 했다.


포도알보다 먼저 터지는 웃음소리,

할머니는 그 소리에 더 활짝 웃으셨다.


그 미소는 말하듯 했다.

"잘 논다, 참 좋다, 여기가 천국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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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흘러

이제는 어머니가 그 자리에 계신다.


어느 순간

어머니의 뒷모습이

예전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걸 느낀다.


마루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모습,

무심히 손바닥으로 무릎을 두드리는 버릇,

어느 날 보니

어머니도 하얀 머리카락을 반쯤 쪽진 채

마당에 계셨다.


그 순간

숨이 잠깐 멎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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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나는 그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성인이 된 아들이

도시에서 내려오는 날이면

나는 문득

마루로 나가 서성인다.


현관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말이 새어 나온다.


“왔나.”


그 말 속엔

할머니가,

어머니가,

그리고 내가

한 줄기 따스한 기억으로

잇대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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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뜻한 얼굴은

포도밭 끝에도,

마루에도,

지금의 내 마음속에도

아직 웃고 계신다.


그 웃음 하나가

세대를 건너

내 아이에게 닿고 있다.


그게 바로

내 삶을 뒤흔든

가장 조용하고 가장 오래된

기억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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