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깜했다. 저녁 다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음에도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도시는 긴 겨울 방학에 들어갔다. 덥고, 더 덥고, 더 더 더운 날씨만을 가진 태국 친구들은 이미 겨울이 찾아오기 전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갔고, 유럽 친구들은 가족의 품을 강조하며 집으로 가버렸다. 이곳에서 아무도 없는 자의 외로움은 형벌처럼 느껴졌다.
한국 친구들은 대부분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의 연말은 텔레비전 속 연기 대상이나 가요 축제, 그 뒤 이어지는 제야의 종소리를 보거나 또는 친구들끼리 시끄러운 음식점에 앉아 일 년도 다 갔음을 한탄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친구들은 이곳의 분위기를 끝까지 누리고 싶은 듯 보였다. 거실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보며 가족끼리 담요를 나눠 덮고 앉는, 그런 차분한 연말은 생소한 것이었으니까.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기에 연말이라고 해서 가족들과의 끈끈한 유대 관계를 우선순위에 두는 인간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한 해의 끝을 슬픔에 빠진 가정집에서 보내기는 더더욱 싫었던 것이다.
옷깃을 세우고 한 손으로 코트의 앞을 움켜쥐어도 어느 틈으로 바람의 유령들은 들어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리의 겨울이 청명하고 산뜻한 공기로 이루어졌다면, 이곳은 수분을 잔뜩 머금은 무겁고 침울한 공기가 온몸에 파고들어 뼈를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걸음을 재촉했다. 한쪽 얼굴이 으스러져 있는 비석이 보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앞마당의 계단을 단숨에 올라가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추기 위해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철컥 집어넣는다. 탁. 돌아가는 소리에 잽싸게 열쇠를 빼서 문을 연다. 검은 유령들이 쫓아와 내 발목이라도 잡으려고 한 것처럼 재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안도감이 몰려왔다.
현관문과 마주 보고 있는 거실의 문은 내가 현관문을 닫는 동시에 덜컹하고 움직였다. 린- 아임 홈. 닫힌 거실 문 너머로 하이, 샤- 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계단에 발을 대자 삐걱하는 소리가 들린다. 단차도 맞지 않는 참으로 이상한 계단이다. 방에 들어가 재빠르게 라디에이터에 손을 갖다 대었다.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난장판이었다. 내일이 출국인데 오늘 밤은 꼼짝없이 새야 할 판이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그 추운 바람에도 들고 온 쇼핑백을 열어보았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한 선물 사이로 미색의 포장지로 감싼 상자를 꺼냈다. 포장지가 차가웠다. 이미 어색해진 그 느낌에 이별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떠나는 날이 오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홱 돌아서기에는 마음이 아팠다.
삐걱-. 삐걱-. 계단을 내려가 닫힌 거실 문 앞에 섰다.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문을 똑똑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린이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린-. 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눈을 뜨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몇 개월 사이에 린의 눈은 급격하게 쳐져 있었고 늘 눈 끝은 빨개져 있었다. 나를 매정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린의 옆에 앉았다. 미쉐린 형사에게 취조를 당하던 날 이후로 린과 정말 오랜만에 나란히 소파에 앉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린은 위로를 할 줄도 몰라 쭈뼛거리는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괜찮다. 다 지나갈 거다. 그런 빈말이라도 하지 못한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참으로 쓸데없이 정직한 편이었다.
린에게 선물 상자를 건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상자 안에 있는 스카프를 자신의 목에 둘러보았다. 얼굴이 조금 밝아진 듯했다.
린, 이제 나 떠나요. 그동안 엄마처럼 나를 챙겨줘서 너무 고맙고, 진짜 잊지 못할 거예요.
린은 나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그 언젠가처럼 손을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샤, 나는 있지, 네가 이 집에 없었다면 정말 나쁜 생각을 했었을 거야. 그런데 위층에서 들리는 너의 발자국 소리와 말소리가 나를 살아있게 했어. 너는 정말 큰 위로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