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미학?
프라이부르크 내에 있는 유럽 최대의 태양광 분야 관련 연구 기관, 프라운호퍼 태양광 에너지 연구소 (Fraunhofer ISE). 일하는 사람만 1500명에 육박하다 보니, 학생들을 위한 일자리 인턴 자리가 꽤 많이 나오는 편이다. 또, 자리는 상대적으로 많이 나오는 편이지만, 경쟁도 꽤 치열한 편이다. 나처럼 연구 경력이 일천한 경우엔 자리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같은 학과 동기 중 이미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말하기를, 인터뷰 자체를 별로 걱정할 것 없고, 그저 내가 어떤 것에 관심 있는지, 그리고 내 배경에 관해 물을 거라고 한다. 말은 그렇게 들었지만, 해보질 않았는데 안심할 수가 있으랴. 또, 첫 학기를 시작하는 새내기가 연구소 내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리가 만무하다.
이런 이유로, 인터뷰 일정이 잡힌 이래 내가 면접관에게 제출한 서류를 검토하는 건 물론이고, 나올 수 있는 질문을 추려봤다. 추가로 예전에 대학 지원하면서 준비했던 인터뷰를 살펴보고. 다음은 웹사이트에 올라온 공고를 찾아봤다. 나에게만 오퍼가 온 게 아니라 이미 공고가 올라왔으니, 이미 경쟁자는 있는 거 아니냐는 생각에 요구사항을 더욱 꼼꼼히 살펴봤다.
다음은 면접관에 대한 정보 수집을 했다. 웹사이트에 공개된 논문이 있어서 어떤 연구를 했는지 볼 수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일을 따내면 이런 일을 하겠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그래봐야 제대로 이해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이런 게 있구나, 아니 이게 뭐지 하는 정도...?)
이런 과정을 거친 이후엔, 예전처럼 면접 대본을 쓰지 않고 그냥 취합한 자료를 정리만 했다. 그때 생각으론, 정리만 한 채로 말았으니 나태해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대본을 준비한 인터뷰의 결과가 꼭 좋지만은 않았다는 경험을 떠올리기도 했다. 나태해진 것도 맞는데, 나름대로의 합리화를 했다고나 할까.
인터뷰 당일. 수업을 듣는데도 조금 뒤에 있을 인터뷰가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사실 면접관이 제시한 시간이 수업 시간과 겹치는 지라, 시간을 조금 바꿔 달라고 했는데, 철저한 '을'이 그런 요구를 하는 게 당돌하진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면접이 시작됐다.
면접관은 간단한 인사를 마치더니, 본인 소개부터 본인 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했다. 그러면서 나 말고도 한두 명을 더 뽑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건 이미 내게 자리를 주겠다는 얘기가 아니겠나 싶었다...!)
이외에도 그녀가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이야기할 때, 내가 할 말을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석사 논문까지 본인 아래에서 쓰면 너무 좋고, 기꺼이 논문 지도를 하고 싶은데 이 분야에 워낙 흥미로운 주제가 많으니 다른 부서로 떠나도 좋다고 했다.
나는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지원한 자리가 굉장히 흥미로운 주제이며 이 분야에서 가능한 오래 남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또 면접관이 올린 웹사이트에 올린 공고에 있는 내용을 말했는데, 면접관은 그건 또 다른 사람을 뽑는 거라고 하여, 그때 나는 이미 이 면접을 보는 자리가, 처음부터 나만을 위한 자리라는 걸 생각하게 됐다. (그 짧은 찰나에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이 안도했다....!)
마지막으로, 언제부터 일하고 싶냐고 해서, 당장 다음 주부터도 가능하냐고 물으니, 그건 행정처리상 어렵고 한 달 이내에 시작하는 6개월짜리 단기 계약을 하고, 그 이후에 계약을 더 늘리는 걸 고려하자고 했다. 면접관은 내가 해야 할 일을 이미 하고 있는 다른 학생이 나의 '전력화'를 도와줄 거라고 이야기했다. 내겐 실질적인 사수가 있는 셈!
면접을 마치고 난 이 먼 타지에서 꿈꾸던 직장에서의 자리(물론 인턴이지만..)를 가진 줄 알았다. 면접관은 관련된 서류를 메일로 그다음 날 보내주기로 했는데, 보내기로 한 그 메일은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다가 일주일쯤 지나왔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메일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네게 일을 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번 주 중으로 알려주겠다.”
잘못 봤다고 생각하고 유심히 계속 봤는데,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다. 메일을 보고 얼이 빠져서 한참 생각했다. 면접 당시, 그녀의 말을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메일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나의 분노는 점차 현실 인식, 이윽고 우울감으로 바뀌었다. 왜 또 내게 이런 시련이 있는 건가 하면서...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분명 나 말고 다른 이와 면접을 꽤 많이 하고 그중에 나은 사람을 뽑으려나 보다 생각하니,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배신감도 느꼈다.
많은 생각이 오간다. 애초에 그렇게 내게 확신을 주지 않아도 됐는데 왜 그렇게 말했을까부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보다 더 괜찮은 이가 나타나서 마음이 바뀐 걸까 등등.
그런 생각이 꼬리에 물다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의 생각을 끊고, 그냥 답장을 쓰기 시작한다. 어떤 말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예전에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보냈던 메일을 다시금 찾아본다. 그걸 보니 그때 일이 또 떠오르고 기분이 더욱 우울해졌다. 하지만 우울함은 우울함이고, 해야 할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야말로 구구절절.. 적는다.
“저번 주에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 인터뷰는 아주 인상적이었고, 당신의 아이디어와 프로젝트에 감명받았다. 당신 팀에서 단순히 조교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일하고 배우는 모습을 내 스스로를 상상했다. 아마 내가 당신이 찾는 완벽한 후보는 아닐지라도, 여러 프로젝트에 공헌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좋은 답변 기대한다. 등등”
이 모든 상황에 기분은 나빴지만 이렇게 철저한 '을'의 자세로 글을 썼다. 어찌됐든 구두로 말한 거니까 어떤 구속력도 없는 것이고,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니 나로선 그 어떤 것도 보장된 바가 없었는데, 결과론적으론 그냥 나만 김칫국을 들이마신 셈이 된 거다.
기다림은 이곳 독일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다. 그 기다림 끝에 이처럼 보상이 오기도 하지만, 막막한 기다림 끝에 좋지 않은 결과가 있기도 하다.
적어도 이번 기다림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자리를 준다는 메일이 왔고, 이윽고 정식 계약서도 우편으로 왔다.
그렇게 나는 이곳 연구소에서 6개월 간의 인턴, 학생 연구자의 신분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내가 꿈꾸어오던 일이었다. 독일에서의 첫 일자리이자 내 인생 첫 연구기관에서의 커리어의 시작. 당시 모든 게 아름다웠다.
해가 길어지는 날씨, 꽃이 피는 봄, 나의 미래도 이와 같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