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의 헤드, 교수 M이 몇 달간의 미국에서의 ‘안식년’을 마치고,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연구실 내 모든 구성원이 반년 간 본인의 연구 결과에 대해 발표하는 시간을 다가오게 됐다. 석사과정생에게는 이것이 의무가 아니고, 무엇보다 누구도 관심이 없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한 논문 과정을 구성원들에게 발표하고 피드백을 받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할 거라 생각한 나는 선뜻 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발표 일정은 다가오는데,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없었던 나는 초조해짐과 더불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긴 휴가를 마친 교수님은 나도 발표를 하라며 펌프질을 넣기 시작했다. 이내 발표가 계획에 있다는 말에 굉장히 반가움을 표하며 기대하겠다고 부담을 팍팍 줬다.
실질적으로 발표 자료를 준비할 있는 마지막 1주일. 아직 완벽하지 않은 개념부터, 발표자료, 연구실 내에서 쓰는 틀에 맞추는 것도 꽤 애를 먹었다. 그래도 나는 무언가 이미 발표할 수 있을 거라는 나에 대한 믿음 자체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리를 하니 금요일에 탈이 났고, 그날만은 연구실에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아도 쉴 수는 없었는데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
나의 멘토 J는 그 정도면 됐다고 하면서도, 준비가 안 됐으면 언제든지 발표를 취소해도 된다고 하는데...
'이미 교수가 밥 먹을 때마다 내 논문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취소를 하냐...'
J는 그런 마인드셋이 가능한 독일인 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주말에도 연구실에 갔다. 놀란 건 내가 연구실에 가니 다른 박사생도 있었다는 사실. 몇 시간을 씨름하니, 나름대로 합리적인 결과물이 나왔다. 그대로 이 결과를 발표자료에 옮기고, 몇 가지 이해를 도울 자료를 다듬고 마무리했다. 그때부턴 하루에 몇 번씩 발표 연습을 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대망의 발표 당일이 되었다. 준비한 농담 몇 개는 못 던졌지만, 나머지 8~90%는 준비한대로 발표했다.
이미 이런 발표를 영어로도 몇 번 해봤고, 그때보다 훨씬 더 준비됐고 공부를 더 많이 했기에 떨리지 않았다 (많이 대담해졌다...) 이 분야만큼은 내가 '너희보다 잘 안다'는 자신감이었달까.
그래서 그런지, 이전의 발표에선 심사위원 내지는 몇몇 이들의 질문에 버벅거리는 일들도 있었는데, 한 치의 버벅거림도 없이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잘 대답했다. 어쩌면 대부분 질문이 내가 예상하는 선에서 나왔기 때문이랄까. 많이 성장했음에 스스로 굉장히 뿌듯했다.
발표가 끝나고 J를 비롯한 박사생, 포닥들의 격려 및 칭찬이 이어졌다. 특히 J는 내게 예전보다 내가 훨씬 문제에 대해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아쉬운 건 발표 당시에 교수는 계속 발표에 집중하지 않고 컴퓨터를 들여보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 앞에서 교수 M을 만났다.
M은 발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며 2개월 간 이 정도 아웃풋을 낸 걸 '어메이징, 원더풀' 하다며 좋은 트랙을 밟고 있다고 격려해줬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을 하는데, 하나도 안 들은 줄 알았는데 이미 다 이해한 것 같아 놀라기도 했다.
아.. 이런 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다음날, 마지막 그룹의 발표 날.
교수 M의 강의가 끝나고, 커피 브레이크에 교수가 나의 이름을 계속 연호하는 게 내 귓가에 들린다. 나의 전 직장상사 L을 부르며 ‘너 얘 발표 봤어? 두달 만에 그런 결과를 낼 수 있는 건 아마 네가 그동안 잘 알려줬기 때문일 거야. 아주 인상적이었어.’
L의 놀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악연이라고 생각했던 L과의 인연이, 꽤 흥미롭게 바뀌었다.
지금 생각하기론 단지 내겐 조금 더 많은 기회와 관심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게 더 빨리 이루어졌다면, 아니 어쩌면 그때는 내가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L에게 고마운 건 내가 떠날 때 받는 증명서에 내게 아주 호의적이고 좋은 이야기만 써줬다는 사실이다.
그나저나 제일 기뻤던 건 이 모든 일정이 끝나고, 점심 먹으러 가는 길을 갈 때마다 대화에 잘 안 끼어주던 독일인들이 내게 마음을 완전히 열고, 나를 대화에 끼어준다. 그전까진 그저 석사생이라고 은근히 내리깔던 그들의 시선이 완전히 걷히고 나를 이 연구실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고, 계속 내가 가만히 있어도 말을 거는 모습에서.
이렇게 모든 게 순조로울 것만 같던 나의 연구실에서의 생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