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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Jun 05. 2019

비 오는 날이면 풀냄새가 그리워진다.

미나미아오야마의 분위기를 닮아 우아한 쉼터, 네즈미술관 정원

인구 1천만의 도시 서울에 살다가, 인구 9백만의 도시 도쿄로 왔다. 일본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토카이진(都会人), 도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도시 특유의 인구밀도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평소에 시달리는 만큼이나, 주말이 되면 인구밀도가 낮은 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래서 서울에서나 도쿄에서나 주말만 되면 한적한 장소를 찾아 헤맨다. 한적하면서도 뭔가 다른, 매력적인 장소를.


네즈미술관을 검색하면 종종 나오는 나룻배가 있는 풍경. 날 좋은 날에 가면 호수에 나뭇잎이 비쳐 두 배로 푸르다.


대도시에 살다보면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사람 마음이 다 똑같다. 내가 좋아하는 곳은 누구든 다 좋아한다. 당연히 사람도 많다.


그래도 가끔은 예외적인 장소를 발견하는 일이 있다. 지금부터 소개할 네즈미술관처럼 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멋진 장소를 보석처럼 꽁꽁 싸매고 나 혼자만 즐기고 싶지만 뭐, 인터넷에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곳을 좋아하는 이유, 이 곳의 매력을 소개하고 싶다. 우연히 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네즈미술관에 가서 내가 느낀 포인트에 공감한다면, 나도 두 배로 행복해지겠지.


정원 한켠에 위치한 카페. 단순한 선들을 모아놓은 듯한 천장 구조에서 오른쪽 위 빛의 면(面)이 눈에 띈다. 반투명한 소재로 처리해 햇빛이 은은하게 감싼다. 인공조명 없이도 밝다.





네즈미술관은 1941년 한 사업가의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립미술관이다. 오모테산도역에서 걸어서 20분, 시부야역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걸린다. 일본에서도 입이 딱 벌어지게 비싼 동네인걸로 유명한 미나미아오야마 골목을 걷다가 보면 아주 뜬금없이 나타난다.


일본에 미술관이 많다고는 하지만 시기적으로는 1980년대 일본 경제가 최대 호황기를 맞은 시절에 지어진 미술관이 많아, 2차대전 이전에 지어져 지금까지 남아있는 미술관은 또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아마 그 옛날에 지었기 때문에 미나미아오야마 라는 알짜배기 부지를 미술관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전시는 1층과 2층에서 각각 감상할 수 있는데, 2층으로 가는 길 이 공간도 참 좋아한다. 단순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선들이 엇갈리는 공간 구성에 의자가 경쾌한 리듬을 더한다.


이 곳의 컬렉션은 대부분이 일본과 중국, 한국의 고미술품으로 회화, 다기(茶器), 불교예술 등을 아우른다. 솔직히 말하면 필자의 관심분야와는 백만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 덕분에 이 곳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전시를 제대로 감상한 건 처음 딱 한 번 뿐이고 두 번째 방문부터는 전시는 거의 생략하다시피 하고 정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네즈미술관 좀 가봐! 라고 누구에게 권유할때마다 듣는 답변이 '난 동양의 고미술에는 관심이 없어' 라는 말인데 음, 그거때문에 가라는 게 아닌데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네즈미술관 방문객 중에서도 나처럼 정원에만 관심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정원뿐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아름다운 포인트가 많이 있다. 입구로 접어드는 자갈길 한 편을 대나무가 살짝 가리고 있어, 은은하게 자연광이 비친다.


그럴거면 아예 정원 입장권을 따로 팔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그런 건 없다. 전시 티켓을 끊어야 정원에도 들어갈 수 있다. 전시는 꽤 자주 바뀐다. 대략 2~3주를 쉬고 4~5주를 전시하는 일정이다. 다시 말하면 거의 3분의 1 확률로 휴관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네즈미술관에 가고 싶다면, 사전에 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내가 방문하려는 날 전시가 있는지를 확인해봐야 한다. 다행히 영문 버전도 있으니 아래 링크해둔다.






곧 쯔유(梅雨)라고 불리는 일본의 장마가 찾아오고 그 후에는 숨 쉬기도 버거울 정도의 찜통더위가 시작된다. 이런 시기에 바깥에서 시간 보내기에는 정원구경만한 콘텐츠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운 날에는 사실 어딜 가도 덥지만, 그나마 네즈미술관 정원은 밀도있게 구성되어 있어 길은 좁고 그늘은 많은 편이라 적어도 한낮의 햇볕을 피하기에는 좋은 장소다.


이 곳의 정원은 뭐랄까, 밀도있게 구성되어 있다. 어딜 가나 시야의 대부분이 푸른색이다.


그리고 비 오는 날엔 평소보다 더 좋다. 빗방울을 머금고는 나무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풀내음을 퍼뜨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초록빛을 가득 들이마시는 것 같아 흐뭇하다. 혹시 우산을 안 가지고 갔더라도 미술관에서 정원으로 가는 길목길목마다 커다란 장우산이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어 적어도 이 구역 안에서는 비 맞을 걱정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초가을 비 오는 날 풍경. 초록색은 한 풀 꺾였지만 살짝 바랜듯한 색감이 매력적이다.





정원 규모는 어느쪽인가 하면 딱 적당한 정도다. 너무 넓지도, 너무 좁지도 않다. 커다란 호수를 중심으로 각 구획마다 나름대로 포인트도 있고 아기자기 꾸며져 있어서 구경거리가 아쉽지 않으면서도, 너무 넓어서 지치는 일도 없다.


그래도 이상하게 정원을 슬슬 돌다보면 어딘가 앉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내 마음처럼 다리도 좀 쉬어가고 싶어서? 또는,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 프레임만이 아니라 내 두 눈의 프레임에도 담아놓고 싶어서?



어떤 이유이든 잠시 쉬어가기로 결정했다면 정원 중간중간에 벤치도 있지만, 역시 제일 좋은 방법은 정원 내부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다들 나와 생각이 비슷하기 때문에 창가에 자리를 잡고 싶다면 최대한 오픈시간인 10시에 맞춰 오는 게 안전하다. 피크타임엔 창가자리는 커녕 자리 잡기조차 어려워 밖에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


카페 창 밖으로 바라보는 정원의 풍경. 5월 말, 예년보다 기온이 높아져 조금 이르게 찾아온 초여름을 맞아 초록빛으로 반짝인다.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에 갔다가 크게 실망한 적이 없지만 이 곳 네즈미술관 카페는 그 중에서도 더 나은 편이다. 커피와 디저트는 물론 파스타나 리조또, 함바그 같은 간단한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데 음식이 나쁘지 않다.


아니지, 이 정도면 꽤 맛있는 편이라고 해도 되겠다.



사진은 해산물 토마토 파스타와 스트로베리 쇼트 케이크.


파스타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서 성의있게 만들었다는 게 잘 전달되는 좋은 요리였다. 올리브도 신선했고, 토마토 소스에 직접 삶아낸 토마토가 넉넉히 들어가 있어 한결 깊은 맛이 느껴졌다. 케이크도 기대 이상. 뭐 이건 실패하기가 더 어려운 메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크림도 딸기도 다 맛있는 걸 써서 너무 달지 않게 입에서 사르르 녹았다.


창 밖 풍경도 아름답고 음식도 맛있고. 바깥에 기다리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눈치가 느껴지는 것만 모르는 척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오래 앉아있을 수 있었을텐데, 나도 기다리는 사람 심정이 이해가 되어서 오래는 못 있었다.






네즈미술관은 필자가 도쿄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를 꼽아야 한다면 다섯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들어가는 장소이다보니, 계절마다 한 번은 꼭 방문해서 사진을 잔뜩 남기곤 한다. 예쁜 사진이 많아 고르느라고 힘이 들었다. 더 많이 소개하고 싶지만 일단은 여기까지만.


사진은 없지만 이 곳 기념품샵도 꼭 들러보기를 추천한다. 도쿄에서 뭔가 일본스러우면서도 고급진 기념품을 고르고 싶다면 여기가 제일 낫지 않나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가격대는 높은 편이지만, 그만큼 조잡하지 않고 품위가 있다.


오늘의 관련글은 교토의 이끼정원 산젠인과, 도쿄의 또 다른 매력덩어리 키요스미정원이 있는 키요스미시라카와에 대한 소개글로 달아본다. 이전글에서 키요스미정원에 대해서는 아주 짧게만 언급했는데, 기회가 되면 이 정원을 만들 때 돌 하나하나에까지 의미를 부여해 이 곳은 관서(関西, 간사이) 지방처럼 꾸며야 하니 교토에서 수석을 가지고 왔다는 둥,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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