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시간』이 드러낸 만연한 권력

페이지 너머의 풍경 – 책이 불러낸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글

by 순간의 기록자

[메인 이미지 대체 텍스트: 클레어 키건의 소설 『너무 늦은 시간』(So Late in the Day) 표지. 파스텔톤 창틀과 책상이 그려진 일러스트 커버에 책 제목과 저자, 번역자 정보가 인쇄되어 있다. 출판사는 ‘다산책방’]






오늘 이야기할 책은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이다.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고민하지 않고 주문을 했다. 간결하고 절제된 스타일의 글을 쓰는 그녀의 책답게 119페이지의 얇은 단행본이다. 읽다 말고 부글부글 화가 나기도 하고, 어이없는 상황에선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책은 막힘없이 술술 읽혔다.

그런데 책에 대한 생각을 쓰려고 하니 급정거를 하듯 멈춰졌다.

왜일까를 생각하다 다다른 결론은, 책 속 여자 주인공들이 겪는 일들은 '내가',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겪어봄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겪는 일이기에, 그 ‘일상성’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줄거리

3편의 단편집으로 묶인 책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너무 늦은 시간>

카헐이라는 남성의 시선을 통해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과의 관계가 무엇 때문에 균열에 이르게 되는지에 대한 여정을 그렸다.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집필을 하기 위해 찾은 여성 작가의 공간에 한 남자가 불쑥 찾아와 그녀의 전문성을 폄하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다. 이에 작가로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복수를 하는 이야기다.


<남극>

결혼을 한 여성이 다른 남성과의 관계에 호기심을 느끼며 떠난 여행에서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한다.


한 마디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이야기를 자연스레 따라가다 보면 불편한 지점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책을 다 읽으면 책을 읽으며 쌓였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다음 다시 새로운 책으로 손을 뻗게 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책은 마지막 장을 읽었을 때 마침표의 감정보다는 전체를 조망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다시 책을 재독 하게 했다.



일상의 감정, 무례한 권력

그럼 본격적으로 『너무 늦은 시간』을 중심으로 책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들을 풀어보겠다.


이 책에서는 일상 속에 스며든 불편하고 미묘한 감정들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여성 독자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개인의 경험을 책으로 옮겨놓은 듯 한 구절들에 어렵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 이야기를 같은 온도로 읽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어떤 이는 '이게 그렇게까지 문제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같은 문장을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이 나뉘는 것이야 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짚은 게 아닐까.


이는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특권을 인지하기 어렵듯, 일상화된 젠더 불균형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성찰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일들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권위 의식과 무례함, 그리고 그로 인한 관계의 균열을 섬뜩하리만큼 생생하게 드러내는 작가의 필력이 감탄스러웠다.


더불어 행하는 자가 성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듯 숨겨져 있는 일상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해한 친절' 뒤에 숨은 우월감

영화 상영 후 이어지는 관객과의 대화(GV) 풍경은 클레어 키건이 포착한 미묘한 권력관계의 단면을 보여준다.


질문 시간이 되면 으레 열에 아홉은 남성들이 가장 먼저 손을 들고, "감독님,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라는 정중한 인사로 시작을 알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친절한' 시작과는 달리 자신이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감독의 의도까지 꿰뚫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자신의 해석을 길게 늘어놓는 경우다.


심지어 자신만의 '평론'을 펼치듯, 쉬운 이야기를 어렵고 복잡한 말로 포장하며 거들먹거리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겉으로는 질문의 형태를 띠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빈약한 지식이나 통찰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순간이다.


이는 무해한 친절을 빙자한 질문으로, 미묘한 권위 의식 속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드러나는 장면이라 하겠다.


'의미 없는 말' 뒤에 숨겨진 폭력

클레어 키건은 일상의 언어가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 또한 날카롭게 파고든다. 소설 속 카헐의 약혼녀 사빈은 남성이 여성을 부를 때 비하하는 언어("씹년", “암캐”, “창녀”와 같은)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말한다. 하지만 카헐은 "아,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방식이 그래. 그냥 아일랜드의 관습이야. 보통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답한다.


카헐의 이 대답은 명백한 비하 발언을 '문화적 관습'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 뒤에 숨긴다. 이는 그 속에 담긴 혐오와 폭력성을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축소하려는 시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언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언어는 사유를 지배한다. 대상을 규정하고, 사유 속에서 현실을 만들어 낸다.


여성을 비하하는 호칭은 문화적 관습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경멸과 비하를 뿌리 깊게 내재화하는 적극적 행동이다.


그럼에도 이를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말하는 이의 책임을 회피하고 동시에 듣는 이의 고통을 부정하는 행위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아일랜드에서만 통용되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 일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 또한 너무나 쉽게 통용되고 있다.


일부 남성들의 경우 남성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에 '이년, 저년' 혹은 '씨발년'과 같은 비하적인 호칭을 농담처럼 주고받으며, 비뚤어진 남성성을 과시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여성에 대한 경멸을 내면화시키고, 나아가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비하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도움'이 아닌 '함께'의 의미

작가는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불균형과 그에 대한 인식 차이 또한 정확하게 짚어낸다.


사빈은 카헐과 함께하는 동안 매일 식사를 준비하고 식재료를 샀다.

그에 대한 노고에 대해 고마움을 받지 못했음을 지적하자, 카헐은 "오늘 저녁에는 내가 음식을 주문하고 돈도 냈잖아. 당신의 그 화려한 타르트에 들어간 체리도 전부 내가 샀고. 그리고 오늘도 종일 당신 물건 옮기는 걸 도와줬잖아"라고 반박하며 이야기의 핵심을 비켜간다.


카헐은 사빈의 지속적인 희생과 노력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이 '어쩌다 한 번' 행한 일이나 '돈을 지불한' 행위만을 우위에 둔다.


또한 그는 "도와줬잖아"라고 말하며 자신의 행위를 공동의 협력 관계가 아닌 타자성에 방점을 두고 '호의'나 '선심'으로 규정한다.

삶의 동반자로 함께 살아가자고 결혼을 얘기하면서 '돕는다'는 표현이 맞는 말일까? 함께 삶을 공유하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들을 '돕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애초에 그 일이 한쪽만의 '몫'이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동등한 관계라면,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이나 '도움'이 아니라, 공동의 책임과 노력으로 '함께 하는 것' 이어야 한다.


자신이 행하는 노동과 기여는 크게 인식하면서, 여성들이 행하는 가사노동의 경우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집에서 있으면서 뭐가 불만인데?”라는 평가절하의 말 또한 같은 경우다.


지속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노동은 당연시하거나 심지어 아예 기억조차 못 하는 젠더 인식의 왜곡된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일상 속 장면이라 하겠다.



깨달음의 기회를 걷어찬 결말

『너무 늦은 시간』이 충격적인 것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누구나 겪어봄직한 현실을 사실적 표현해 결론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카헐은 자신의 잘못으로 결혼이 무산된 상황에서, 사빈과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자신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기회를 허공에 대고 사빈에게 "씹년"이라고 욕을 내뱉음으로써 걷어차 버린다.


심지어 변기 뚜껑을 올리지 않고 소변을 보는 것에 의기양양해하는 카헐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사빈의 말이 그의 귓가에 들리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앞에 카헐은 안타깝게도 내면의 여성 혐오를 재확인하고 고착화하는 쉬운 길을 택한다.


『너무 늦은 시간』은 단순한 한 남자의 결혼 실패담이 아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재현되고 반복되는,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책의 시작을 알리듯 적혔던 인용문이 선명하게 가슴 언저리에 머문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던 말 한마디. '별것 아닌' 일이라고 치부했던 순간.

혹은 '도움'이라고 생각했던 행위들 속에,

누군가의 깊은 불편함과 고통이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요?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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