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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원 Jul 25. 2020

첫 사랑 마지막 의식 / 독후감100

이언 매큐언

 다시 한번 경악한다. 이언 매큐언에게.

[넛셸, Nutshell] 후에 그의 책을 다시 집어 드는 것은 아니었는데.




내가 소설을 분류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이야기의 명암明暗을 따지는 것이다.

밝은 소설. 읽으면 재미있고 기분도 좋고 대부분의 소설이 나에겐 여기에 속한다. 주인공의 역경이나 슬픔도 하나의 과정이며 이 또한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승화된다.

밝지 못한 소설.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이 분류에 속한다. 5·18 광주 민중항쟁에 관한 소설로 역사가 덮이고 진실이 사라지는 마당에 밝을 수 없는 소설이다.

밝지 않은 소설. 이언 매큐언이 쓰는 소설이다. 좌절과 슬픔을 뿜어내는 소설이다. 소재도 가능한 드러내지 않았으면 하는 인간의 비정상적 욕정을 건드리는 것들로 채워진 밝고 싶어 하지 않는 어둡고 싶어 하는 소설이다. 가능한 피해 가려고 하는 소설들이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읽을 책 내가 선택함에도 불구하고 만난다.

작년 5월에 읽었던 [롤리타] 이후 다시 ‘밝지 않은 소설’과 만났다. 이런 류의 소설들은 읽기도 더디다. 읽는 내내 작가의 심미적 희열을 느끼는 것보다 주제 자체가 주는 불쾌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책에 담긴 여덟 편의 소설을 읽고 생각이 많아졌다.

부정적으로 밀어내려는 생각보다 세상이 작가를 인정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다.

1975년에 데뷔작 [첫 사랑 마지막 의식]으로 서머싯 몸상을 받았고, 영국 내외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었고, 영국 왕실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부커상 후보에만 여덟 차례 오르기도 했다. 대가임에 틀림없다.


 소설이란 읽는 행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경험을 득하는 과정으로써 내가 직접 해보지 않아도 습득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이런 과정이 다양성을 경험하게 해 준다.

조금 더 넓게 본다면 소설을 읽는 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주제 자체가 불쾌감을 주더라도 어두운 소설이라도 이것저것 모든 것이 버무려진 세상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읽어볼 가치를 찾는다.



 이제야 책 내용으로 갈 수 있겠다.

매큐언의 상상력은 천재적이다. 몇 가지 상상할 수도 없는 상상력들이 있다.

입체 기하학을 통해 ‘표면이 없는 평면’을 소개한다.

커다란 종이 한 장을 공식에 따라 단계별로 접으면 표면이 없는 평면이 재현되면서 접은 종이가 손 안에서 사라진다. 이를 똑같이 아내에게 적용해서 아내를 사라지게 했다. 하지만 메아리쳐 울리는 그녀의 물음은 여전히 남아있다. "무슨 일이야?"


아이를 미칠 듯이 좋아하는 엄마가 있다.

그래서 엄마는 외동인 아들이 자라지 못하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말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아이를 집에 가둬 두고 밤낮으로 지켰고, 항상 이유식을 먹일 정도로 아이를 미칠 듯이 좋아하는 엄마가 있었다.


 글의 처음에 언급된 2016년에 발표한 [넛셸]이라는 작품은 자궁 속 태아를 화자로 등장시켜 햄릿을 재해석했다.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여기, 한 여자의 몸속에 거꾸로 들어있다.”


 그렇다고 작가가 잔잔하고 서정적인 배경의 묘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형은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부모님을 웃게 만들려고 푼수 짓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열 살 생일 기념으로 막 카메라를 선물 받았고, 그 사진은 내가 처음으로 찍은 것 중 하나다.’

 이러다가 마지막 한 문단이면 이야기를 뒤집기 충분하다. 독자는 예기치 못한 순간 드러나는 작가의 의도를 대면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경악한다. 이언 매큐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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