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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모삼천지교 Mar 22. 2024

유모차 도둑을 찾습니다

덕분에.라고 인사를 건네려구요.

내일은 아이의 생일입니다. 달력을 받으면 자기 생일 먼저 체크하는 우리집 어린이가 올 해를 기점으로 이제 한 자릿수가 아닌 두 자릿수의 나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이에게는 그저 생일 선물과 많은 축하를 받는 마냥 좋은 날이지만, 제게는 아이가 이만큼 자랄 동안 저는 그 사이에 엄마로 얼마나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까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고는 합니다. 매일매일 마주하며 얼마나 자랐는지 보이지 않는 아이의 성장만큼, 스스로의 성장도 매일매일은 잘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아이의 생일을 계기로 한번씩 되돌아 보고는 합니다.


올해는, 아이 생일을 준비하며 어릴때 영상을 모아 축하해 줄까 싶어서 구글 드라이브를 뒤져보았어요. 그러던 중, 거의 모든 사진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핫 핑크색 유모차에 얽힌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네, 바로 이 유모차입니다 ㅎㅎ. 아이도 싣고, 가방도 싣고, 장본 것도 싣던 만능 캐리어였죠.

그리 크지 않은 휴대용 유모차였는데 여기저기 엄청나게 끌고 다녀도 고장 한번 나지 않는 것은 물론, 비루한 팔 근육으로도 하루종일 아이를 데리고 돌아다닐 수 있게 도와준 덕분에 만든 추억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차에 애칭을 붙이고 아끼듯이, 저도 이 말 없는 핑크색 유모차에 애정이 담뿍 생겼었죠. 농담반 진담반 나중에 고장 나면 집 앞 뜰에 고이 묻고 무덤도 만들어주겠다고 했었으니 어느 정도인지 아시겠죠?

늘 보따리 보따리 주렁주렁 걸고다니던, 유모차. 사진을 보니 그리워지네요.

그랬던 저의 소중하디 소중한, 핫 핑크색 유모차.

오늘은 이 유모차 덕에 없는 변호사까지 소환한 사건을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아이는 세 살 반.

하루의 반은 물놀이 놀이터를 오가며 보내는 일상이 흐르던 한 여름이었습니다. 그날도 해골 같은 자전거가 놓인 보도를 지나 센트럴 파크의 놀이터로 향한 그런 날이었죠. 해골 같은 자전거는 이런 경우를 말합니다.

참 인정사정없이 바퀴와 기어까지 다 훔쳐가고 몸통만 남았습니다.

자전거를 길에 세워두면서 훔쳐가지 않도록 자물쇠로 묶어둔 것을 바퀴와 자전거에 붙어있는 값나가는 것들은 죄다 뜯어가고 제일 큰 뼈대만 남겨두어 주인도 포기해 버리면서 생긴 도심의 흉물이랄까요. 기둥에 묶인 채 눈과 비가 스치고 강렬한 태양이 지나간 뒤 녹까지 슬어버린 이 해골 같은 자전거를 볼 때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맨해튼의 양심을 보는 듯해서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길거리에 주차되어 있는 멀쩡한 자전거도 뜯어가버리기도 하는 뉴욕이지만, 그래도 단 하나. 도둑들도 잘 건드리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유. 모. 차. 입니다


아이가 잘 걷는 나이가 되어도, 성인에 비해서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적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에게는 도보 이동이 많은 뉴욕 생활의 '생명'과도 같은 유모차 말입니다. 가방 같은 것은 공원 벤치 같은 곳에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은 '그냥 마음껏 가져가세요.'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인데, 도둑도 양심은 있는지 이 유모차에 손을 댔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이들 간식이나 옷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이런저런 필수품이 들어있는 가방까지 보통 주렁주렁 같이 걸고 다니기 마련이라 사실 도둑들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꽤 매력적인 아이템일 듯 한데 생각보다 도난사고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그 사람 많은 센트럴파크에서도 유모차는 아이들이 노는 공간 한편에 다들 세워두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도 별 탈이 없었더랬죠. 저도 처음에는 '과연...?'이라는 의심어린 눈으로 아이와 놀면서도 미어캣처럼 5분마다 벌떡 일어나서 내 유모차가 잘 있는지,근처에 누가 어슬렁거리지는 않는지를 살폈지만 얼마지 않아 경계를 풀고 안심하며 공원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센트럴파크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친구 가족과 저녁 약속이 있는 콜럼버스 서클로 향했습니다. 콜럼버스 동상을 중심으로 어퍼 웨스트의 시작점이 되는 센트럴파크 남서쪽 모퉁이, 콜럼버스 서클에는 각종 브랜드 스토어와 홀푸드 마켓, 그리고 PerSe와 같이 잘 알려진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는 타임워너 센터가 위치하고 있는 곳입니다.

공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밥을 먹고 장을 봐서 집에 오기 좋은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도 길바닥보다는 깨끗한 대리석 바닥이라 센트럴 파크를 가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들리는 코스가 되기도 했던 곳이었습니다. ( 늘 길에 누울 준비가 되어 있거나, 신발도 안 신고 고맨발로 질주하는 아이를 키우시는 분들은 깨끗한 바닥의 소중함...너무 아시죠? 허허허)


하루종일 햇볕 아래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며 물놀이까지 하며 불태운 오후의 여파로 레스토랑에 도착도 전에 아이는 이미 벌겋게 익은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아이가 잠들어 있을 때의 고요함이란 정말 간절히 1초라도 더 오래 누리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라, 그대로 태우고 식당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입구에서 예약자 이름과 테이블을 확인해 주던 매니저가 식당 내 유모차 반입은 어렵다는 것이 아닌가요. 웨이터들의 서빙 동선에 방해가 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짐은 모두 따로 빼서 식당 내의 coat room에 맡겨두고, 유모차는 매니저가 직접 지정하여 알려준 대로 식당 바깥쪽의 통행로 한편에 얌전히 주차를 해두었습니다. 이미 센트럴 파크에서도 유모차를 대 놓고 여기저기 오갔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바로 이전에 들어간 가족들 역시 같은 장소에 유모차를 대고 있었기에 다른 이견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열 개정도 되는 유모차들 사이에 얌전히 주차를 하고 아이를 안아 올린 뒤, 비몽사몽인 아이를 토닥이며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죠.

잠시 후 기다리던 친구네가 도착했습니다. 잠깐의 수다 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그때까지 졸던 아이가 언제 그리 그랬냐는 듯이 눈을 반짝 떴습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 개운하게 번쩍 뜬 아이의 맑은 눈. 그러니까,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한 맑은 눈이 주는 넘치는 에너지의 부담스러움.. 뭔지 다들 아시죠? ) 어디를 가나 시끄러운 뉴욕이지만, 비교적 조용히 식사를 하는 레스토랑이었기에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 아이의 관심을 끌 장난감을 쥐어주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얼른 남편에게 식당 바깥에 대 놓은 유모차 뒷주머니에 넣어둔 색칠공부를 꺼내서 가져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모차에 장난감을 꺼내러 간 남편이 이상한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모차가... 없는데?????? 사라..졌어."


멀쩡한 유모차가 증발해 버렸다니, 말하는 남편도 당황스럽고 듣는 저는 황당했습니다. 먹던 포크도 내려놓고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친구네 부부까지 다 함께 나가보았지만... 불과 30분 전에 대놓았던 장소에는 매끈한 대리석에 비친 조명만 보일뿐, 제 핑크색 유모차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더군요. 식당 매니저를 불러 주차되어 있던 유모차가 도난당했음을 알리니 빌딩 보안요원이 등장했습니다. 그로써 화기애애하던 저녁식사는 나온 메뉴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막을 내렸고, 그 길로 족히 키가 2미터는 되는 거구의 보안요원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해야 했죠. cctv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경찰에 도난신고를 하고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만 열람이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결국, 우리는 인근의 경찰서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유모차의 퀄리티가 얼마나 양육자의 삶을 좌우하는지는 아마 어린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아실 것 같습니다. 하필 도둑맞은 그 유모차는, 수개월 전에 한 수술로 인해 팔과 어깨에 많은 힘을 줄 수 없던 제가

약간의 힘 만으로도 핸들링이 수월하다는 소문을 듣고 새로 산지 일주일도 안된 제품이었습니다. 여행을 자주 다니다 보니 비행기에도 휴대가 간편하게 훅 접을 수 있다는 이유로도 사람들이 많이 사용한다는 후기에, 여기저기 다니기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 딱이었던 정말 만족하고 있던 아이템이었죠. 그리고, 하필! 바로 다음날부터 남편은 긴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 한동안 아이와 둘이 지내고 있어야 하는 제게, 유모차가 사라졌다는 것은 장보기도, 동네 산책도, 아이가 유모차에서 잠든 사이 마시는 달콤한 커피 한잔도 모두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빌딩 보안요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을 따라 지하철 역사 안에 위치하고 있다는 경찰서를 향해  미로처럼 이리저리 얽힌 길을 경찰관의 뒤통수를 따라 정신없이 걸었습니다. 남편은 아이를, 저는 아이 물놀이로 젖은 옷가지가 가득한 짐을 들고 덥고, 냄새나고, 어두컴컴한 콜럼버스 서클 지하철 역사 안을 한참 걸어 경찰서에 도착했어요. 우리 사건을 담당해 주실 분 앞으로 안내받았는데, 가슴에 '로드리게스'라는 이름의 명찰을 달고 있는 다갈색 피부의 작고 단단한 체구의, 재미있는 모양의 콧수염을 가지신 분이었죠. 로드리게스보다는 '롸아드리게스'라고 찐한 발음으로 불러드러야 할 것 같은 경찰 아저씨는, 진지하고 무서워 보이는 미간의 주름과 달리 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시점부터, 한국 멜로드라마의 팬임을 고백하며 신고 조서 작성을 정말 친절하게 도와주셨어요. 신고가 완료되었다는 확인서는,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지사에서 받아야 한다는 말에 졸리고 짜증 내는 아이와 짐까지 들고 다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는 저희를 경찰차에 태워 지사까지 데려다준 것도 이 롸드리게스 경찰 아저씨였습니다.


그렇게 경찰서에서의 조사를 마무리 한 뒤, 레스토랑 매니저에게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실제 해당 유모차를 대고 식당 안으로 들어와 달라 요청한 것도, 그 장소를 지정한 것도 레스토랑 측이었으니 도난당한 유모차에 대해서 보상이 어떻게 될지 확인  연락을 달라고 했죠. 친절한 말투의 매니저는 내일 바로 확인 후 답을 주겠다 했습니다. 매니저의 요청대로, 경찰에 신고한 증빙과 도난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전후 상황과 유모차의 기종, 가격, 신고 시간과 같은 정보를 상세 기재해서 메일을 남겨 두고 그렇게 우리는 긴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아, 다음날 출장인 남편은 사라진 유모차 덕분에... 다 늦은 저녁에, 문을 연 유아용품점을 찾아 급히 유모차를 사러 달려가야 했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출장 가는 남편과 인사를 한 뒤, 아이를 데리고 집 앞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들어와 메일함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어제까지의 친절한 말투는 어디 가고 레스토랑의 매니저는 자신들의 property(자산)이 아닌 곳, 즉 빌딩 내에서도 레스토랑 내의 공간이 아닌 공용 구역에 유모차를 세웠다가 유실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레스토랑의 책임이 없다는 다소 강경한 내용의 회신을 보낸 것이 아니겠어요? 이유인즉, 해당 공간에 작게나마 '이 공간은 어떠한 상업적인 용도에도 귀속되지 않은 공용공간으로, 이곳에 놓는 개인 물건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죠. (나중에 가서 확인해 보니, 정말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정도로 아주 작은 패널에 기재되어 있더군요. 참. 나...)

피 같은 유모차가 도난당하도록 그냥 놔두고는 책임이 없다니요. 제가 화가 나거나 말거나, 레스토랑의 매니저는 저혈압인 저도 순식간에 고혈압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문장만 반복했습니다.

 "It's not our responsibility.(그건 우리 책임이 아닙니다)."


결국, 저는 그곳이 레스토랑의 자산에 해당하는 구역 내였는지 아닌지 인지할 방법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식당 매니저의 제안에 따라 그곳에 유모차를 댔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조목조목 따지는 와중에도 스스로도 충분히 느낄 만큼 말속에는 떨림과 긴장이 전화기를 타고 상대에게 전해지고 있었어요. 너무 화가 나니, 목소리도 부들부들 떨리더라고요. 안 그래도 느린 말투는, 한층 더 느려졌습니다. 타고난 느린 말투가 그때처럼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어요. (화나면 빨라지는 사람들도 있던데. 안타깝게도 그런 류가 못됩니다. 되려 염소가 되면 모를까...--;;; )

그런데, 제 떨리는 목소리의 건너편에서 마치 기회를 잡았다는 듯 그때부터 더 빠른 속도로 속사포로 “미안하지만, 우리는 배상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만 녹음기처럼 반복적으로 읊어대는 게 아니겠어요? 무엇보다 화가 났던 포인트는, 그 매니저의 말투 속에 ‘(관광객이나 크게 다름없는) 이방인인 너희가 어쩌겠어’라는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투지력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Well.. I understand your point. However, that is the fact that your employee suggested us to park the stroller at that place.  
It means, the restaurant have a responsibility for stollen also. From now on, I’ll contact through our lawyer for this isssue.
(너희들이 주장하는 바도 이해는 하겠으나, 식당 직원이 우리에게 유모차를 바로 그 장소에 주차하도록 가이드를 주었고, 이 말인 즉 도난에 대한 책임에서 레스토랑도 벗어날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해. 지금부터는, 이 문제에 대해서 변호사를 통해 연락하도록 하겠어.)”


라고 힘을 주어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법적으로 이야기하자는 메시지를 남겼던 데는 감정적으로 이방인을 만만하게 보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누가 봐도 변호사 수임료가 유모차 가격보다 배는 나오는 것이 뻔한..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뻔뻔한 매니저의 태도와 설명을 들으며 한가지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 강경하게 나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도난 당한 것을 알린 후에도, 식당 측에서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한다고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빈 타임 없이 예약된 고객들만도 쉴새 없이 들어오는 식당에서, 전후 상황을 디테일하게 확인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끼어들 새가 없었던 듯 합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가는 곳에 위치한 식당이었고, 그냥 슥 둘러보더라도 로컬 보다는 관광객의 비율이 높은 것이 보였던 곳이라 그의 시점에서는 우리 역시 '그저 이 도시를 금세 스쳐 지나갈' 사람 중 하나로 섣부른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그런 여행객이라면, 그저 '안타깝지만, 우린 책임이 없어.' 같은 말만 반복을 하더라도 머지않아 미국 대륙을 떠나 사라질 사람이라면 굳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애쓰지 않더라도 몇 일 후면 상대 역시 별 말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일테니까요. 물론, 이 역시도 식당의 위치와 매니저의 태도를 기반으로 한 저의 휴리스틱이지만 , 사람이란 자세한 정보가 없을 때는 가진 경험과 정보로 어림짐작을 할 수 밖에 없으니...식당의 직원들과 매니저들이 그랬듯 저 역시 그들이 이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거죠.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만약에 한국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좀 더 여행객이 아니라는 티를 내는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면 달랐을까?

내가 그냥 아이엄마가 입는 편안한 옷이 아니라, 좀 더 차려입고 방문했다면 매니저의 대응이 달랐을까?

와 같은 별별 질문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습니다.


공공장소에 가방을 놓아두고 다니더라도 도난사건이 잘 발생하지 않은 안전한 나라로 한국이었다면, 어쩌면 이 에피소드는 아예 경험할 일이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이었다면 제가 어떤 사고의 피해자가 되어 신고를 하고 문제 해결을 논의하며 혹시 내가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라서 받게 될 차별적인 시선이 있을까에 대한 걱정은 아예 배제했을 것 같았죠. 그러고 있노라니 그간 가만히 있어도,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며 숨을 쉬듯 수월했던 사소한 일들과 다른 나라에 살며 '좋은 점'들을 더 보느라 간과한 좋지 않은 점들역시 그 못지 않게 많았다는 점도 그간 내가 간과하고 살았다는 생각 역시 스쳐갔습니다.


어쩌면. 그 날 그 매니저는.

그냥 '무책임한 사람'의 전형이었을 수도 있고, 예외적인 상황등은 고려할 줄 모른 채 회사 규정에 나와 있는 말만 읊어대는 융통성 없는 직원이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미시시피에서 태어나 자라, 뉴욕으로 왔던 친구 윌리엄이 말했듯, "New York is the No. 1 producer of ass hole. (뉴욕은, 나쁜 놈들 만드는데는 1등인 도시라니까.)" 처럼, 그저 흔히 마주할 수 있는 뉴욕식 4가지의 전형이었을 수도 있지요.


아, 그 유모차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최후통첩 같은 제 메일과 전화로부터 3일 후.

당시 우리가 유모차를 도난당한 레스토랑은, 뉴욕 내에도 4-5개 정도의 식당 비즈니스를 하는 외식 비지니스를 크게 하는 회사에 소속된 곳 중 하나였는데 ...바로 그 회사의 인사부 디렉터로부터 메일이 왔습니다.  

Good afternoon Ms XX,

 It was brought to my attention that your stroller was taken from in from of our establishment. I’m sorry to just contact you, I was on vacation and returned yesterday to an avalanche of emails and getting around to yours.  Ordinarily, we are not responsible for strollers parked outside of the restaurant, that area belongs to the mall and not apart of the restaurant proper per se. However, I also learned one of our managers parked the stroller for you and placed the stroller outside, which now makes a difference.

We’re willing to be reasonable, please provide the name and model number of the stroller and taking in account the wear and tear we can reimburse you partially for your loss.

Again, please excuse my tardiness for getting back you so late.

YF

( 요약 : 보통 레스토랑 외부에 주차된 유모차의 경우 장소 자체가 몰에 속하기 때문에 책임을 질 이유가 없으나 이번건의 경우, 매장의 매니저중 하나가 직접 외부에 주차하도록 가이드를 주었다는 점을 인지하여 손해배상에 대한 책임을 질 예정이니 보상받아야 하는 모델의 이름과 금액을 알려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그렇게 황당했던 유모차 도난사건은 레스토랑측으로부터 손해본 금액을 전액 배상받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덕분에, 아이 사진마다 한 귀퉁이에라도 콕 박혀있는 핫 핑크 유모차를 보며 그저 재미있고 좀 어이없었던 하나의 추억만 떠올리게 되었어요. 만약 무책임하던 레스토랑을 상대로 포기했다면, 아마도 이 핫 핑크색 유모차는 울화통의 상징이자 관광객의 피해에 무관심한 뉴욕을 상징하는 기억으로 남았을 듯 합니다. 도둑맞은 뒤, 부랴부랴 가서 새로 산 유모차는 그 뒤 우리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당근마켓을 타고 다른 어린이를 만나러 떠났습니다. 그리고, 도둑의 손을 타고 우리 곁을 떠난 도난당한 유모차는 아마도 뉴욕 어디에선가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한때 나마 우리 아이와 즐거웠고 못 잊을 에피소드까지 선사한 핫 핑크색 유모차가 이제는 각각 지구의 반대편에서, 또 다른 어린이를 태우며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고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이를 키우며 예상못한 상황속에서 만나본 적 없던 사람도 마주하고, 상황을 해결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요러 저러한 생각들을 해보면서 그간 크게 돌아본 적 없던 사람들과 삶을 인지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막연히 인지는 하고 있었지만 좀 더 자세히 알고, 모르고 가 내 인생에 크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며 가볍게 간과했던 것들도 한번 들여다보아야 겠다 생각했던 계기가 되었던 거죠. 그렇게 생각의 가지가 하나씩 뻗어나갔습니다.


그 가지들은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유모차와 비슷하게 바퀴가 달린 의자인 휠체어 위의 삶이 궁금해지는 쪽으로 뻗어나가기도 했고, 백인이 주류인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인사를 하지만 길에서 마주치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만난 듯 인사하지 않는 반 친구의 엄마를 마주해 보기도 하며 한국에도 있을 외국인들이 느끼는 한국은 어떨까 궁금한 쪽으로 자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둘러싼 뉴욕의 환경을 연구하고 분석하면서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간 이런쪽에 전혀 지식이 없었다는 어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도 했었죠.  


그리고 그 모든 관심의 마지막에는 '만약 내 아이가...?'라는 질문을 넣어보며 여러가지 상황 속의 나는 어떤 부모로 조언을 건넬 수 있을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턱턱 막히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더라구요. 만약 내 아이가 미묘하게 드러나는 차별의 대상이 된다면 난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할까, 반대로 내 아이가 차별을 행하는 입장에 선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만약 내 아이가 몰라서 하게 되는 어떤 비난받을 행동의 주인이 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어야 할까. 이런 별별 질문들 말이죠. 넓고 넓은 무지를 인정하고 나니 보아야 할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읽어봐야 할 책도, 보아야 할 영화도, 들어보아야 할 강연들도 늘어났죠. 그리고 그 그 과정에서 한 생각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보게 된 부분들에 대해서 끄적끄적 글로 남기는 엄마가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아이를 키우며 마주한 시간들을 돌아보니 아이를 가지는 순간에도 몰랐고, 막 낳아서 키우면서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만. 아이에게 줄 답을 찾기 위해 헤메인 시간들이 제 세계를 넓혀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아이를 처음 낳아 품에 안았던 그날보다 지금의 저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도 하구요. 여전히 엄청나게 편협하고, 편견에 시달리기도 하며,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 인격적으로 성숙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아이를 키우며 혹시나 아이가 커서 제게 던질 질문들을 고민하며 예습하듯 애를 쓰는 시간이 10년전의 저와는 다른 지금을 선사해 준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니, 올 해 아이 생일에는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고맙다는 말도 함께 꼭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시작이 너였다고 말이죠.  








안녕하세요. 

제 글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이시라면... 

저는 "맨모삼천지교"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고 있는 작가입니다. 

'맹모삼천지교'에 오타난 것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들꼐 간단히 설명을 드리면,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맨하탄으로 갔다가 거기서 아이를 키우던 시간을 지나며 "맨(하탄)삼천지교"가 되었다 말씀드리고 싶네요. 

마케터로 브랜딩을 하며  17년의 시간을 지나, 사람들의 행동속에 감추어진 "conventional wisdom(일반적인 통념)"을 호기심을 담아 생각해 보는데서 시작 되었습니다. 

제가 읽고 쓰는 기록들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sunny_story_of_my_life/)과 Threads(https://www.threads.net/@sunny_story_of_my_life?hl=en)에도 공유하고 있으니 함께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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