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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 선물과 선물 따라온 달팽이

하루살이의 사리 빚기

by 장미

빗속에 외출했던 남편이 커다란 봉지를 내밀었다.

"위층 사는 지난번 그 전기 기술자가 준 거야. 이 빗속에 대성리 농장에 다녀왔다네."


주말이면 비가 와도 들르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의 텃밭 시절이 떠올랐다. 주말이면 새벽같이 일어나 점심과 커피를 챙겼다. 얼음물에서부터 토시와 모자까지 하나라도 빠뜨리면 내내 아쉬울 사람은 나였다. 당시 남편은 주중엔 직장 생활로 주말엔 텃밭 일로 봄 모종 시기부터 들깨를 터는 가을 어느 시기까지 느긋하게 쉴 날이 없었다. 그런 남편이 안쓰러워 남편은 조금 더 자게 두고 아침형 인간인 내가 부산을 떨다 보면 동녘이 밝아오곤 했다.


인생도 그렇지만 시기를 놓치면 거둘 것이 없는 일 중에 농사는 더욱 그렇다. 심는 것도 중요하고 거두는 것도 중요함을 텃밭 농사를 통해 절실하게 깨달았다. 내 삶의 일정 시기마다 부모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처럼 농사를 짓는다면 인생도 틀림이 없겠구나 생각하곤 했었다.


"전화가 왔더라고. 아파트 앞이랬더니 이 봉지를 들고 우리 집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이지만 어쨌든 함부로 산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구 교체를 하면서 얼굴 한 번은 본 적이 있으니 벨을 눌러 내게 전할 수도 있는 상추를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남편이 도착할 때까지 집 앞에서 기다렸다는 데서 받은 느낌이다.





빗속에서 수확했다고 하기엔 나눔의 양이 적지 않다. 남편과 내가 일주일 내내 먹어도 남을 만큼 많은 양이다. 우중이라 일이 힘겨워서였나 보다. 남편과 내 상식으로는 우중 푸성귀 수확은 금물이다. 하지만 주말농장이라면 이런 상식적인 일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기도 하다. 상추 잎을 하나하나 따내지 못하고 밑동을 아예 칼로 도려냈다. 깔끔했을 푸성귀들이 세찬 빗물과 함께 튀어 오른 흙들로 얼룩져 있다. 푸성귀에 튀어 오른 흙들은 몇 번 헹구니 다 떨어져 나갔다. 빗물을 머금어 더 연해진 푸성귀들이 씻을 때도 물기를 털 때도 쉽게 부러지고 떨어져 나왔다.


기온이 오르면서 상추들은 고갱이를 내기 시작한다. 결혼식 등 다른 행사라도 겹쳐 주말에 텃밭 가는 일을 한 번이라도 거르고 나면 상추 꽃대가 쑥 올라와 있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상추 꽃이 피기까지는 잎을 한동안 더 맛나게 따 먹을 수 있는 상태인데 밑동을 잘라냈으니 아쉽기만 하다. 주말에만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 않음을 이웃의 주말농장 수확물을 보며 새삼 반추하게 된다.


"좋은 푸성귀에는 좋은 고기가 어울리는 법."

남편이 한우 등심을 사는 데 용돈을 다 털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떨며 빗속을 달려가 고기를 사 왔다. 얼마 전에는 한 2년 만에 먹은 듯한 삼겹살 구이를 먹고 속이 불편해했던 적이 있었기에 소고기로 정한 것이었다. 상추엔 돼지고기가 더 어울릴 거라 생각했지만 비싼 한우라 그런지 돼지고기보다 부드럽고 맛나다. 좋은 푸성귀와 그에 담긴 이웃의 마음과 한우까지 먹고 있으니 왠지 삶의 작은 즐거움 중 하나가 이런 것 아닌가 싶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라는 말이 떠올랐다. 젊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던 삶의 중간 결산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젊어서 아니 늙기 전에 죽고 싶었던 내 바람은 어쩌면 치기였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입에서 성장기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산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지만 산다는 건 참 별것이 아닐 수도 있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말이야."





저녁 식사 후 나머지 푸성귀들의 흙을 씻어냈다. 아래쪽에 쑥갓도 제법 많이 들어 있었다. 내일 아침쯤이면 물기가 빠질 것이다. 맑은 날 수확한 푸성귀라면 씻지 않고 바로 신문지에 싸서 비닐봉지에 담아두면 된다. 하지만 오늘 푸성귀는 빗물을 잔뜩 머금었을 뿐만 아니라 튀어 오른 흙까지 엉겨 있어 씻어두는 편이 훨씬 낫겠다 싶었다. 흙을 씻어낸 후 물이 빠질 즈음 두어 겹 신문지에 싸고 비닐봉지에 담아 보관하면 되겠다. 상추를 씻고 돌아서는데 상추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뿌리를 잘라낸 상추가 움직인다면 상추는 식물이 아니다.


달팽이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사용하던 분홍 채집통은 머릿속에만 남았다. 버려지기 직전의 방울토마토 플라스틱 상자를 찾았다. 거기에 상추 몇 잎 담고 달팽이를 옮긴 후 작은 양파망을 잘라 씌운 위에 뚜껑을 덮었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중이라 화단까지 다녀오기엔 남편에게도 나에게도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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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물기가 어느 정도 가신 상추와 쑥갓들을 탈탈 털어 종이에 싸고 비닐봉지에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손이 바삐 움직였다. 달팽이의 하룻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뚜껑을 열었다. 달팽이가 안 보인다. 나무젓가락으로 상추를 뒤집었다. 아래쪽 상추 잎에 붙어 있는 달팽이가 미동도 없다. (죽으면) 안 돼, 하는 순간 달팽이가 더듬이를 길게 내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단잠을 깨운 모양이다. 고단한 여행 끝, 좁은 플라스틱 집에 들어 잔 하룻밤이 수월할 리 없었을 터다. 비가 그치려는지 몇 방울 떨어지다 말다를 반복한다. 하룻밤의 짧은 만남을 고할 시간이 왔다. 달팽아, 안녕. 어디서든 잘 살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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