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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작 Aug 28. 2024

20. 할머니의 묘원에서

[할머니의 손] Ⅳ. 흔적과 기억과 시간


 할머니의 마지막 흔적이 자리한 장소는 내가 사는 곳에서 한 시간 반쯤 운전하여 외곽으로 나가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주말 중 하루를 할애해서 거기에 들르곤 했다. 할머니를 만나 기도문을 읊고 인근에 있는 경치 좋은 식당에서 식사하면 적당히 시간이 맞았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은 동행과 맛있는 식사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묘원은 총 8기를 안장할 수 있다는 가족 봉안묘 홍보를 듣고 신청하여 합격(?)한 곳이다. 생전에 할머니가 주변을 둘러보고 흡족해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제껏 텅 비어 있던 그곳에 할머니가 먼저 입주한 셈이다. 아마 두 번째는 할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클 것이고 그것을 ‘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 같다. ‘가족 봉안묘’라고는 하지만 그곳에 안장되기를 미리 거부한 이도 있었다. 지방에 있는 선산에 묻히기로 되어 있다고 선언한 이도 있었다. 그걸 듣던 엄마는 내게 툭 하고 질문을 던졌다.


 “너 나중에 저기 들어갈래?”


 정말 궁금해서 하는 순수한 질문이었지만 좀 우습게 들리기도 했다.     


 “아니. 나한테까지 순서가 올 것 같지도 않고, 꼭 들어가고 싶지도 않아.”

 “그래.”

 “엄마는? 엄마는 저기 들어갈 거야?”

 “아니, 내가 미쳤니. 절대 안 들어갈 거야.”     


 엄마의 답은 단호했다. 이내 엄마는 죽어야 끝난다고 오랜 세월 생각하고 되뇌어 왔지만, 지금은 이제 엄마의 일부가 되어 굳이 도망가고 싶지도 끊어내고 싶지도 않은 그 질기고 징그러운 인연들에 대하여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계기로 그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굳이 지상에 남기고 가는 흔적까지 맞대가며 영원토록 이들과 붙어 있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는 당신이 원하는 마지막을 솔직하게 말했다.   

  

 “나 봉사 다니는 성지 알지. 거기 큰 나무 있어. 한강이 다 내려다보이는 데야. 그거 내 나무로 정해놨으니까, 화장하면 벽제 동산에다가 산골하고, 나 보고 싶으면 나무 보러 오고 그러면 된다.”    


 나는 괜히 눈물이 나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엄마 죽으면 엄마는 선택권 없는 거 알지?”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됐어. 나는 엄마 동해에다 뿌리고 아빠는 서해에다 뿌릴 거야. 두 사람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라고. 절대로 다음 세상에서도 만나지 마셔.”

 “…… 알았어, 알았어.”     


 좁다란 가족 봉안묘에 함께 영면할 여덟 명이 과연 누가 될까. 나도 엄마도 동생도 아닐 것이고 둘째 삼촌 내외나 셋째 삼촌 내외도 아닐 것이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널찍한 그 집을 여유롭게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남은 사람들끼리 제 죽음 이후를 그려 보는 시간이 종종 생겼다.


 할머니 자리 바로 앞에 성모마리아 상이 있다. 새하얀 색으로 시작했을 것이나 비와 바람에 색이 바래 지금은 꽤 낡은 느낌이 나는 상이었다.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하고 할머니 자리에 그늘을 만들어 주는 위치에 서 있었다. 할머니는 성모님의 가호를 받으며 시원한 그늘에서 편히 쉬었다. 그래서 얼마 후 엄마가 말했던 봉사지의 큰 나무 앞에 방문했을 때, 그곳 또한 흰 성모상이 내려다보는 장소란 걸 알게 되고는 나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에게 내가 필요하고 나 또한 여전히 엄마가 필요하듯, 엄마들도 자기를 살피고 기도해 줄 엄마를 그리고 있으리란 걸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 여기 위치 좋네. 눈이 시원해.”

 “그치? 탁 트인 데에서 오래 쉬면 좋을 것 같아.”

 “여기 기억해 둘게. 엄마 원하는 대로 할게.”

 “그래, 알았어. 아직 십 년은 더 지나야 할 텐데, 뭐.”

 “더 살다 가. 애기 스무 살 되는 것도 보고.”


 엄마는 그게 내 맘대로 되느냐고 웃었다.     



 

 묘원 근처에 이름난 고깃집이 하나 있어 할머니 방문을 마친 후 그리로 가는 것이 정해진 코스였다. ‘○○갈비’라는 상호가 붙어 있던 그 식당에는 어린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정원이 크게 딸려 있었다. 정원으로 나가는 길에는 여름이면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졌고 가을 경치 또한 일품이었다.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주었고 그럼에도 부서지는 햇살이 이마에 코에 어깨와 손에 와닿았다.


 거기 가면 항상 돼지갈비를 사람 수만큼 시켰다. 불판에 치이익 소리를 내며 구워지던 달콤한 고기 냄새가 올라올 때마다 나는 군침을 삼켰다. 큰 유리창으로도 푸른 숲이 보였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 양옆에는 가족 단위 손님이 올 때가 많았다. 서로 한 마디 대화도 하지 않은 채 휴대폰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식사를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얼굴 볼 수 있을 때 많이 봐 두는 게 좋을 거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더는 할머니의 얼굴을 볼 수 없고 손도 만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위해서는 달걀찜과 공깃밥을 따로 시켜야 했다. 그 고깃집에 할머니와 동행했어도 그 메뉴를 꼭 주문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고기를 편히 드시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우리가 먼저 찾았을 테니까.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 가며 소화기관이 튼튼해졌고, 어른과 다름없이 먹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달걀찜을 따로 시킬 일이 없었다. 아이는 놀라운 속도로 고기를 먹어 치우는 사람이 됐다. 이제 남은 가족 중에 고기를 못 먹는 사람은 없었다.


 떠난 할머니를 만나는 일에 이런 기억들이 얇게 한 겹씩 덧씌워졌다. 할머니가 모르는 우리만의 일이 함께 덧씌워졌다.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얼마 후 그 고깃집은 폐업했다. 주차장 한가운데에 서 있던 상징석 같은 것이 무참히 파헤쳐져 자리에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울컥한 감정이 들었다. 할머니와 함께 이곳에 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나는 할머니와의 다정한 식사 장소를 빼앗긴 듯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추억할 장소를 빼앗긴 후로는 어떤 곳도 그곳 같지 않았다. 길 건너 멀지 않은 곳에 큰 요식업 브랜드에서 세운 삼 층짜리 음식점이 있었고 비슷한 메뉴를 파는 데다가 넓은 주차장에 별채에 라이브 가수 공연까지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곳이 할머니를 반가이 뵙고 들르는 데에 어울리는 곳 같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차를 타고 나가면 큰 베이커리 카페며 소박한 개인 카페며 곳곳에 먹을거리와 즐길 거리가 넘쳤지만, 거기에서는 할머니 냄새가 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를 기억하는 방식들이 세상에서 조금씩 사라지거나 변형되는 일들을 이후로도 자주 겪었다.


 봉안묘 안에서 할머니의 흔적은 이미 흙과 구분할 수 없게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머니를 붙잡는 방법은 이제 정말 ‘기억’ 뿐인 걸까. 할머니가 남긴 것들이 내게서 사라지지 않게 붙드는 방법뿐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조금 울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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