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논하는 일의 허황함
그림 - 김주희 작가님의 <기다리다>
진심이란 게 뭘까?
이중마음으로 똘똘 뭉친 나를 돌아보며 글을 쓴다. 누군가의 진심, 그것은 참 허황된 말이다. 무엇을 진심이라고 할 텐가?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 언제나 일관된 행동을 하는 것? 줄곧 '진심'의 힘과 중요성을 이야기해 오고 있었지만 나는 진심에 대해서 규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어느 순간 내가 누구는 진심이고 누구는 가심이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다.
한 때는 말과 행동이 진심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나는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정작 진심이 아니었던 것은 그들이 아닌 나였다. 실제로 누군가 나를 향해 가식적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미움 받기 싫어서 나를 꽁꽁 싸맨 일이 나에게는 진심 자체이나 그들에게는 진심 없음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나'의 진심일까?
진심을 나누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질문의 주어를 바꾸어야 한다. 진심이 아닌 사람은 없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상대의 진심이다. 그러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이기에, 우리가 딴지를 거는 질문을 던져야 할 대상도 바로 '나'이다. 상대의 말과 행동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상대를 믿고 내가 편안할 것인가, 상대를 믿지 못하고 내가 괴로울 것인가?
상대의 말과 행동이 실제로 진심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상대를 믿지 못함으로써 괴로워지는 것은 상대가 아닌 나였다. 예전에는 나를 속인 누군가에게 치가 떨리는 배신감을 느꼈는데, 지금은 나를 속이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안다. '상대가 못 믿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를 믿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른 사람의 진심을 논하는 나는 과연 진심으로 세상을 대하고 있는가?
스스로를 속이는 이중마음
나는 진심인데,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생각해서 속상하고 억울했던 순간이 많았다. 나만은 진심이라고, 스스로를 철저하게 속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내가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견고하디 견고한 나의 이중마음을 직면하는 일은 다른 누군가를 향해 품었던 증오심보다 더 끔찍한 기분을 일게 했다. 아니, 내가 그런 존재라고? 나는 인정하기 싫었다.
마음의 실체, 그 밑바닥이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들킬세라 덮어두고 포장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는 포장해둔 그것이 진짜 내 마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중마음'이다. 살아온 삶에 의해서 단단해져만 가는 이중마음은, 나의 눈과 귀를 막기에 충분했다. 그것을 깨부수기 전에는 상대가 보이지 않고 상대의 진심이 들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상대를 믿어주고 기꺼이 속아줄 수도 있게 되었다.
진짜 마음이 진심이다
진짜인 척하는 이중마음에 속아서 그것이 '가짜'인 줄도 모르고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나만의 세상 속에 있어서 외로울 수밖에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만 볼 수 있는 그 가짜 세상에서 왕이 되어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 진심이 아니라, 나의 입장이 아닌 세상의 입장에서 모두를 수용하는 마음이 '진짜 마음'이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진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그것이 '진짜'다. 그러니까 나의 진심을 찾는 과정에서 내 밑바닥이 드러나는 것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내 마음의 밑바닥이든, 더 끔찍한 이중마음이든, 가짜 마음을 모조리 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까. 가리고 있는 가짜만 없으면 진짜 마음이 드러난다. 이제는 밑바닥을 직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 손해다. 가짜가 아닌, 진짜로 살자. 세상만큼 행복하게-!
가짜로 살아서, 잘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