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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한 새벽빛 Apr 26. 2016

오늘을 산다

마음수련 명상 후 겪은 변화와 인문학에 대한 생각

그림 - 김주희 작가님의 <축제>, 2008
* 개인적인 변화임을 밝힙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이 다른 만큼, 마음수련 명상을 통해 겪게 되는 변화도 제각각입니다. 자기가 먹어놓은 마음이 버려진다는 것만 똑같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도 이제 동이 난 걸까. 머릿속을 스쳐갔던 생각의 조각들이 아직 작가의 서랍 속에 잠자고 있고, 그것들이 글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구색을 갖추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글도 더 적게 쓰면서 지난 주부터 시간이 유난히 빨리 흐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었기 때문일까? 벌써 날씨도 덥고, 이대로 눈만 감았다 뜨면 여름일 것만 같다. 그러나 아직, 오늘이다.



마음수련을 하고 나서 나는 무딘 사람이 되었다. 무디다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사소한 것들에 큰 의미 부여를 했던 나는,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지나간 시간 속 세상에 머무르며 계속 괴로워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상한 일이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소중함이 더 벅차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보지 않게 된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는 않게 되었다. 시간의 덧없음과 흘러감 자체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있다.



전보다 말수가 줄었다. 아직도 글을 장황하게 쓰는 것은 여전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조금 더 명료해졌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빈틈없이 그대로 전달하려고 하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여백을 두는 느낌으로 글을 쓴다. 이것은 말주변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글이라고 해도 더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나는 충분히 후련함을 느낄 만큼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보이지 않는 여백을 채우는 것은 청자의 몫일 것이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 하나를 알게 되었다. 아니, 인간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많은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으려고 욕심냈고,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내가 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기억이 부끄러움이 되어 밀려들었다. 물론, 그대로 빼버리면 부끄러움도 없어진다. 마음빼기 명상 덕분에 고정관념의 주범인, 내가 안다고 생각한 것들을 시원하게 비울 수 있었다. 그래서 말수가 줄어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으면 상대의 말을 끊고라도 아는 소리를 떠들어댔을 순간에 예와 달리 조용히 잠자코 있는 내 입이 신기할 따름이다.



글을 막힘 없이 쓰고 있는 것처럼, 막상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쉼 없이 떠들어댈 수 있을 만큼 말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마음수련을 하기 전의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도 입 밖으로 꺼낼 용기는 내지 못하고 꾸역꾸역 다시 삼킬 때가 아주 많았다. 오죽하면 홧병이 났겠나.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사람'으로 규정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들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내가 진짜 나인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인의 평가에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표현하고 싶은 욕망과 회피하고 싶게 만드는 공포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피곤한 삶이었다.



더 이상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헷갈려하며 끝이 안 나는 싸움을 지켜볼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이득이다. 마음수련 명상을 행복의 열쇠라고 여기는 까닭은,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자신'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 없음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자존심을 세우며 뼛속까지 오만하기 짝이 없었던 나인데, 비로소 가장 낮아질 수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용기가 얼마나 강한지 나는 몸소 느끼고 있다. 있으면서 없는 세상처럼, 가장 크고 가장 넓지만 가장 낮은 마음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마음수련의 목적이다. (글 <자존심 빼기 자존감 더하기> 참고)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나는 나고, 지금은 지금이다. 과거에 내가 한 선택들의 합이 현재의 나이기는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스스로 후회라는 덫을 만들어 놓고 혼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오직, 오늘을 산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머리로만 알았을 뿐, 오늘을 사는 것이 어떤 건지 마음에서는 몰랐다. 진짜 오늘을 살아봐야 오늘을 사는 게 뭔지 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항상 빛나는 오늘을 산다. 과거의 내가 그 눈부심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지금은 너무나 잘 아니까, 그 슬픔도 흘려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오늘을 사는 삶의 이치를 알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인문학을 하는 목적이 아닐까 싶다.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문학 책을 통해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되는' 것이 진짜 인문을 의미한다면, 인문학 교육으로서 마음수련 명상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인문학 교육이 되지 않을까? 나의 삶을 돌아보고 신나게 버리는 명상. 교육과 연관 짓는 것이 나의 직업병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이 노래하는 삶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을 기르는 '전인교육'이 유일한 교육의 대안이자 삶의 대안인 것 같다.



아아, 아무렴 어때. 존재하는 것은 오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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