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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명한 새벽빛 Jun 06. 2016

인간에겐 믿음이 없다

영화 <곡성>이 던지는 물음 '뭣이 중헌디?'

이미지 출처 - 영화 <곡성> 네이버 영화정보
[국어사전]
믿다 :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의지하며 그것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다.
의심하다 :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믿지 못하다.
구원하다 : <기독교>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죄악에서 건져 내다.
* 결말을 포함하고 있어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구절이 내용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찾아보고 다수 옮겨 왔으나, 이 글은 개인적인 감상에 의한 주관적인 영화 감상문에 지나지 않으며 특정 종교와는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누가복음 24장 38-39절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영화가 시작할 때 나왔던 문장은 조금 변형된 형태로 기억하지만, 성경에서 찾은 해당 구절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친절히 몸을 만져 보게까지 하셨다. 이것은 영화 <곡성> 후반부에서 종구(곽도원)의 손을 잡는 여인(천우희)의 행동과도 겹쳐진다. 예수님과, 영화 속 여인의 공통되는 바람은 오직 앞에 있는 그 사람이 자신을 '믿는 것'이었을 것 같다. 그것만이 그 사람 하나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언젠가,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었던 기억이 났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10장 20-22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마가복음 5장 25-34절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누가복음 8장 43-48절
43 이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44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4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사람 앞에서 말하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같은 문장이 나오는 대목이 꽤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은 장면에 대하여 기록한 것을 함께 옮겨 보았다. 여자는 '믿음'으로써 병이 나았으며, 여자가 믿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해주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다. 믿음이 없었다면 일부러 나아가 옷자락에 손을 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의 필요조건은 구원에 대한 '믿음'인가 보다. 영화에서 중구가 사는 길도 오롯이 중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살리고자 하는 자"와 "죽이고자 하는 자"의 목소리를 모두 듣지만,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한다. 관객들도 함께 고민했을 것이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믿는다고 달라질까?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믿는다.


달라진다. 여인의 말을 믿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적어도 아빠와 딸은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딸을 향해 "아빠가 다 해결해줄께"라고 중얼거리는 대목에서 중구는 그 누구도 믿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너무 믿었던 나머지, 그는 그렇게 된 것이다. '딸'을 살리고 싶어했으나 어리석게도 무엇이 진짜 딸을 살리는 일인지도 알지 못한 채 어설프게 행동하고 만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놓쳐 버리는 주인공의 행동에 속이 터졌지만 관객마저도 속여 버리는 흥미진진한 전개 덕분에 그의 답답함을 관객 입장이 아닌 등장인물의 입장에서 함께 공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을 너무 믿기 때문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마는 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부제인 이삼(김도윤)의 두려움이 악마를 완성시키는 모습은, 믿는 대로 보인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이, 선과 악으로 기우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면 믿겠는가? 결국 우리가 의심해야 할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 아닐까? 성경에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라는 대목이 나온다.


마태복음 16장 24-28절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며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사람에게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


다른 사람을 의심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메시지는 외지인 일본 남자(쿠니무라 준)와 무당 일광(황정민)의 모습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그들도 두려움에 떠는 '인간'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비춰주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의 음모가 실현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생명을 앗아가는 일을 꾸미고 악행을 저지른 것은 잘못이나, 그것이 실현되게 되는 데는 다른 사람들의 '선택'들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분명히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주민들의 생명을 지켜낼 수 없었으며 오히려 모두가 의도하지 않은 조력자가 되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결국 악의 근원은 그도 그녀도 아닌 인간인 '나'에게 있는 것이다. 믿음의 반댓말이 의심이고, 그 마음이 악을 강하게 한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예수님과 같은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 시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게조차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하물며 우리에게 과연 믿음이 있을까? 예수님처럼 행하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마태복음 17장 18-20절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사람에게 사는 것 말고 뭣이 중헌디?


영화 속 마을 여기저기서 '곡성'이 터져나오는 까닭은, 누군가의 '죽음' 때문이다. 말 그대로 '사는 것' 외에 무엇이 중할까? 중구가 의심했던 그 일본 사람도 죽는 것을 두려워 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발견되지 않으려고 통증 때문에 신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꾹 참으며 눈물을 흘린다.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뭐가 두려워서 도망을 쳤겠나.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소리 없는 곡성이 여전히 울리고 있다. 악마의 손길에서 딸을 지키려고 한 아빠의 노력이 진짜 '삶'을 향한 것이었을까? 단지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던 게 아닐까? 딸 아이가 처음부터 '악마'에 씌인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면? 어째서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악마에 씌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일까? 이것도 하나의 미끼였을 것이다. 단지 마음이 아픈 상태였던 것은 아닐까? 아빠가 캐묻는 것이 자신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어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에 딸이 화를 냈던 것은 아닐까? 아빠 마음도 모르는 딸을 야속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유행어가 된 효진(김환희)의 명대사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그것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물음이었다.



함께 살기 위해서, 믿어야 한다.
믿음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 신선한 영화 덕분에 간만에 성경을 찾아 읽는 재미도 느꼈다. 선과 악이 우리 바깥의 어떤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내면의 이야기라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종교도 '삶'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삶이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원'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으로 치닫고 마는 우리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신이 있는지 논하기 전에, 신을 원망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 같다. 모든 증거들이 상대를 악마라고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그를 선하다고 믿을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는 있을까? 내가 보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상대가 아닌 나 자신을 의심할 용기가 나에게는 있을까? 나에게 그것이 없다면 희망이 없지만, 나에게 그것이 있다면 희망도 있을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도 믿지 못하는데 신이 있다고 한들 신을 믿을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으로라도 서로를 믿고,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라며- 부족한 글을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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