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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 Aug 02. 2022

월평이면 족하지게

2 나를 아는 사람이 그러면 더 마음이 아파서

 화숙 할망은 이번에 처음으로 마을 사업을 통해 색연필과 붓을 잡아 보았습니다. 색연필은 기분을 신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잡은 색대로 싹싹 칠하면 그림대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오늘은 돌담에 그림을 그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싶은 꽃을 그리면 됩니다. 편하게 그리셔요.”

그림을 이끌어주던 선생님이 말할 때, 화숙 할망은 단번에 남편이 좋아하던 수국을 그리기로 하였습니다. 드디어 지지 않는 수국을 그릴 수 있는 날이 왔습니다.  

  화숙 할망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눈을 떴습니다. 멍하니 앉았다가 먼저 간 남편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종이에 가득 남편의 넓은 얼굴과 눈, 코를 그리고 웃고 있는 입을 그렸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새벽에 떠 있는 달을 보면서 남편에게 혼잣말로 물었습니다.

  “내 그림 맘에 들어요?”

   화숙 할망에게 그림은 먼저 간 남편과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이 좋아한 수국을 그리면 남편과 손을 잡고 걷던 수국 길이 펼쳐졌습니다.  

 왕 할망이 했던 말이 또렷하게 귀를 때렸습니다. 언니 동생으로 오랫동안 지내온 사이여서 토씨 하나까지 모두 서운했습니다.

‘내 사정을 뻔히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화숙 할망은 마음을 칼에 베인 것처럼 쓰렸습니다.

  회관에는 아직 게이트볼 팀이 자리를 못 떠나고 씩씩거렸습니다. 왕 할망을 뜯어말리던 삼자 할망이 흘러내린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왕 할망을 나무랐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언니는 왜 화숙이 젤 아픈 부분을 건드려!”

  “자기 때문에 연습이 번번이 미뤄지는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에이, 나도 몰라. 이제 시간도 얼마 안 남았고, 나도 될 대로 돼라 할 거야.”

  “오늘 연습 안 해요?”

  “하긴 뭘 해. 화숙이 그림 그린다잖아.”

왕 할망은 꽃바지를 한껏 추키고 신발을 고쳐 신고 회관을 나섰습니다.   

‘이래서야 무슨 시합을 한다고!’

벌써 아들네 손주 놈이 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 갔습니다.

  “무얼 만들어 줄까?”

  왕 할망은 손자 생각에 들떴습니다. 방금 전 일은 잊기로 했습니다.

늘 보던 집 앞 산딸 나무가 오늘따라 더욱 높게 보였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솔이가 왕 할망을 보고 웃었습니다. 왕 할망은 늘 보던 사이처럼 편하게 말해 주는 손주가 고마웠습니다. 할망의 품에 강아지처럼 부비는 손주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가 폴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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