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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재와시간 Sep 29. 2022

계절이 허용하는 것들-여름: 진심의 복숭아

  일렬로 가지런하게 주차된 차들을 지나 ‘113동 7-8라인’이라고 적힌 아파트 입구를 지나칠 때, 익숙한 그 향기가 나면 여름이다. ‘아니! 벌써 이 향기가?’ 하고 머리 위를 올려다보면 살랑살랑 하얀 듯 보랏빛인 듯한 아카시아가 보인다. 아카시아 향기는 슬쩍슬쩍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에, 코를 휙-하고 지나가는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아카시아 향기가 너무 반가운 날엔, 괜히 아파트 입구를 한 번 더 돌면서 향기가 또 코를 스치고 지나가길 기다린다. 이렇게나 아카시아 향을 기다리는 것은 밀당하는 달콤한 향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아카시아 향기가 끝날 때쯤 등장하는 여름이 허용하는 것들 때문이다.

 



  여름이 허용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달콤한 것은 복숭아다. 잘 익어 한입 베어 물면 물이 손목까지 타고 흐르는 새하얀 복숭아다. 요즘은 비닐하우스에서 사계절 과일을 맛볼 수 있다지만, 내가 말하는 복숭아는 그리 흔한 복숭아가 아니다. 이것은 여름방학에만 맛볼 수 있는 외할머니의 복숭아다. 그리고 진심의 복숭아다. 여름방학이면 늘 그랬듯이 여동생과 나는 외할머니 집에 갔다. 외할머니 집의 베란다에는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까끌까끌한 복숭아가 대야에 놓여 있었다. 외할머니는 베란다 앞에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대야에 복숭아 껍질을 툭툭 떨어트려 깎았다. 그리고 까끌까끌한 껍질을 벗어낸 하얀 복숭아를 무심하게 툭툭 잘라내었다. 툭툭 깎아 떨어트린 복숭아에는 먹는 사람을 배려하는 호의는 안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호의는 없을지라도 진심이 있다. 무심하게 놓인 복숭아처럼 툭툭 놓아지는 진심이 있다. 그리고 화려하게 장식한 겉모습이 없다. 장황하게 늘어놓는 설명이 없다.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라는 간극이 없다. 배려하는 자의 우월감이 없다. 배려받는 자의 모멸감이 없다. 그저 달콤한 맛과 달콤함 끝에 오는 만족감, 그리고 좋아하니까 먹인다는 진심이 있다.



  호의는 분명 윤리적으로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그 호의라는 것은 간혹 호의를 받는 자의 자존감을 깎아 먹는다. 그리고 호의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그에 상응하는 무엇을 기대하게 만든다. 주는 자에게는 자신의 것을 내어준다는 뺄셈이 남고, 받는 자에게는 타인의 것을 받는다는 덧셈이 남는다. 하지만 진심은 어느 것도 빠지지 않으며 더해지지 않는다. 그저 나의 진심과 타인의 진심이 만났다 흩어질 뿐이다. 외할머니의 진심은 복숭아의 달콤한 물로 팔뚝을 타고 흐르고 입안에서 달콤함으로 퍼졌다가 흩어질 뿐이다. 흩어짐 한가운데 행복감이 있을 뿐이다. 그저 그 행복감을 서로 나눠가질 뿐이다. 이처럼 여름은 외할머니의 복숭아를 허용한다. 달콤함과 행복감을 허용하고 그 속에 숨어있는 진심을 만끽하는 것을 허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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