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찬 바람에 실어 보내면 어김없이 봄은 온다. 열두 달 사계절이 신의 계획인지 에너지의 순환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삶의 순환을 보여준다. 차갑고 시린 마음을 잘 애도하고 나면 애도 후의 설렘은 온다.
내가 처음 애도를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방학이다. 방학이면 늘 내 여동생과 나는 외할머니 댁에 갔다. 방학 때마다 반복되는 그 루틴이 나는 단 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 댁에는 친척언니인 Y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Y 언니는 하얀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책을 많이 읽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틈만 나면 다투는 동생과 나를 침착하게 달랠 줄 알았다. 언니는 나의 밀린 일기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 연예인의 최신 소식을 전해주기도 했고,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했으며 나와 친구의 교환 일기장에 깜짝 편지를 써놓기도 했다. 언니 오빠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던 장녀인 나에게 Y 언니는 언니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여름과 겨울의 방학이 Y 언니로 가득했다. Y 언니와의 시간은 밀린 일기를 꾸역꾸역 써넣어 어느새 일기장의 날짜와 현재의 날짜가 일치하면 끝이 났다. 그리고 돌아온 일상의 거실에서 동생과 나는 엉엉 울었다. 방학이 끝이 나서가 아니라 헤어짐의 그 생경한 감정이 감당이 되지 않아 울었다. 아빠는 그렇게 울면 다음엔 외할머니 댁에 못 간다며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그런 엄포로는 달래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이별의 감정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경험했다. 이별의 감정은 피아노 학원의 작은방 안에서 피아노를 기계적으로 치면서 잊어내는 것이라 생각했다. 피아노를 기계적으로 치고 노트 위 열 개의 동그라미에 빗금을 치다 보면 잊혀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별의 감정을 애도하는 것은 관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글픈 생각이 의식에 닿기 전에 발현하는 무의식에 일상을 내맡기면, 어느새 애도의 슬픔이 빠진 일상을 살게 되는구나 싶었다. 그렇다. 애도의 기본은 심장 근처에서 저릿하게 쏟아지는 감정을 뱉어내고, 관습에 나를 내맡기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여름과 겨울, 사계절에 두 번씩 반복 학습을 통해 배운 애도는 거대한 것이 되어 나를 덮쳤다. 방학 때마다 울던 나에게 엄포를 놓아 달래던 아빠가 죽었다. 무서운 표정 뒤에 장난기를 숨기고 외할머니 집에 못 가게 할 거라던 아빠가 죽었다. 이른 아침 학교에 나를 내려주고 뒤돌아서 달려가던 나를 불러 세워 인사하던 아빠가 죽었다. 그리고 나는 학원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게 밤하늘을 바라보며 일상을 살아냈다. 그렇게 나를 관습에 내맡기고 하루를 살아가다가 잠들기 전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벙어리처럼 울었다. 다음날 해가 뜨면 엄마의 침실에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베개를 보면서 숨죽여 울었다. 심장 근처가 얼얼할 때까지 눈물을 쏟아내면 다음날 다시 일상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쏟아내고 살아내고를 반복하면 어느샌가 쏟아낼 것은 적어지고 그냥 살아지게 된다. 쏟아내야 채울 수 있다는 삶의 순환처럼.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눈가에 아주 희미한 눈물을 머금고 웃으면서, 떠나간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렇게 떠나간 이를 누군가와 추억하고 공유하다 보면, 떠나간 이는 더 이상 슬픔의 존재가 아닌 행복한 추억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사라진 존재가 아닌 지금 나와 함께하는 존재가 된다. 추억하는 나 자신과 함께하는 존재,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애도의 슬픔은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은 설렘이 되기도 한다. 설렘은 긴 애도의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면 따스한 햇살과 함께 흰나비로 온다.
여느 때와 똑같은 교실이었다. 친구들도 똑같았고 선생님도 똑같았다. 다른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배우고 있었다. 흰나비와 청무우밭. 흰나비를 상상하며 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시를 다 읽어내기도 전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신발주머니를 챙겨서 나오라는데 무슨 영문인지 몰랐다. 시를 다 읽어내지 못한 날로부터 얼마 가지 않아 아빠는 차가운 발을 하고 내 앞에 누웠다. 나는 아빠가 누워있는 사각의 병원 침대 끝에 서 있었다. 침대 끝에 희끝하게 나온 아빠의 발이 너무 희어서 살짝 손을 갖다 대었다. 너무나 차가웠다. 종아리의 상처를 보니 우리 아빠의 다리가 맞는데 아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난 생각했다. 아빠는 죽는구나. 아니 이미 죽었구나. 아빠의 혼은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이 몸에는 없구나. 나는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아빠를 보고 아빠의 혼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생각했다. 혼의 색은 산소호흡기에 옅게 어린 숨처럼 하얀색일까 싶었다. 혼은 숨일까. 혼은 흰색일까. 혼은 흰나비일까. 아빠의 혼은 흰나비일 것이다. 봄볕 가득한 향기로운 꽃밭에, 봄볕 가득한 싱그러운 풀밭에 꽃냄새 풀냄새 맡으며 풀과 꽃 끝에 앉아 낮잠 자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편안하고 따스한 봄날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의 나는 흰나비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렌다. 아빠가 곁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괜스레 외출 길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렇게 흰나비는 햇빛이 쨍한 봄날에 바람과 함께 날아와 설렘을 뿌리고 간다. 빛의 섬광처럼 깜짝 파티의 흰 폭죽 가루처럼 등장해 설렘을 주고 간다. 그러면 나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처럼, 깜깜한 방에서 깜짝 파티를 맞이한 사람처럼 설레게 놀란다. 흰나비는 그렇게 왔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슬프지 않다. 나에게 아빠는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추억이고 설렘이고 나를 지켜주는 따스함이다. 너무 따스해서 가끔은 그리워 서글플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렘이다. 그렇게 봄은 나에게 애도 후의 설렘을 허용한다. 시린 겨울을 보낸 풀들이 자라는 것을 허용하고, 풀숲에서 흰나비가 날아오는 것을 허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