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서울 은평구 연신내역와 중랑구 봉화산역을 오가는 6호선 전철 안엔 역마다 대표 여행지를 친절하게 적어 놓았다. 그 가운데 성북구 돌곶이역의 명소 ‘의릉’이 눈길을 끌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 40기의 조선 왕릉(북한에 2기) 가운데 처음 들어보는 능 이름이서다.
성북구에 같이 있는 정릉이나 이웃동네에 자리한 태릉은 알겠는데 왜 의릉은 몰랐을까.
궁금한 마음에 찾아간 왕릉에서 의릉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아담하고 평범한 의릉을 특별하게 하는 또 다른 점은 능을 감싸고 있는 천장산이다. 의릉이 서울에 있는 조선의 왕릉 가운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만든 산으로 산책로를 따라 향긋한 숲 내음을 맡으며 걷기 좋다.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이윤, 1688~1724)과 그의 비인 선의왕후 어씨(1705∼1730)의 무덤이다.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 경종은 37살, 부인은 26살에 돌아가셨다. 경종의 어머니는 역사 드라마에 자주 나왔던 희빈 장씨(장희빈)다. 경종은 13살 세자시절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 비극을 목도해야 했다.
게다가 태양왕으로 불리며 46년간 장기 집권했던 아버지 숙종과 달리 불과 4년의 재임기간 후 승하했다. 몸이 허약했던 경종은 자손 없이 죽고 이복동생이었던 영조가 임금 자리를 이어받는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이렇게 짧게 별 흔적 없이 조용히 가신 분들이 또 있을까 싶다.
능에 들어서면서 보이는 의릉의 한자어 의(懿)가 궁금해 관리소에 물어보니 아름답다, 훌륭하다라는 뜻이 있단다. 후대인 영조 때 지은 것으로 경종임금의 성정이 담겨 있다고. 이런 능 이름은 경종과 영조임금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이복형이기는 하지만, 그는 경종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영조의 어머니가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이 사형을 당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영조와 경종은 친형제 이상의 우애를 유지했다.
영조는 좋았던 이복형과의 관계가 노론, 소론 등 당파들의 개입으로 인해 정적 관계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이 죽었기 때문에 영조는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까지 받는다. 이 경험은 영조가 당쟁을 억제하고 탕평을 추진하게 된 결정적 동기 중 하나가 됐다.
알고 보니 조선 왕릉은 명칭 속에 저마다의 뜻을 품고 있었다. 관리소 직원 아저씨가 알려준 왕릉 이름 가운데 ‘사릉’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어린 나이에 권력다툼에 희생된 조선시대 6대 임금인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가 묻힌 능으로, 비명에 간 단종을 생각하며 여생을 살았을 것이라 여겨 무덤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 지었다고.
의릉을 돋보이게 하는 천장산은 해발 140m 정도로 낮고 완만하며 숲이 울창한 산이라 산림욕하며 걷기 좋다. 산의 한자어 이름도 남다르다. 천장(天藏)은 불교에서 사찰의 입지조건으로 꼽는 가장 빼어난 명당 터로서 ‘하늘이 숨겨놓은 곳’ 이란 의미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천장산 일대는 조선 왕족의 묘지가 많이 조성되었는데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도 이곳에 조성하였는데 훗날 연산군이 왕릉의 규모를 갖추고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다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이후 연산군의 왕비였던 신씨의 묘까지 이곳에 조성되었다가 지금은 모두 이장되었다.이는 동네이름 회기동(回基洞)의 유래가 되었다. 의릉이 있는 동네 석관동(石串洞)은 천장산의 한 지맥이 돌을 꽂아 놓은 듯이 보여 돌곶이 마을이라고 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옮긴 것이다. 동네에 6호선 전철역 이름도 돌곶이역이다.
왕릉을 품은 산답게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이 살고 몸체가 용틀임하듯 자라나는 향나무가 눈길을 끈다. 안내판에 무려 160살이라고 적혀 있었다. 소나무 가운데 나이를 먹으면서 껍질이 붉어지는 적송(赤松)들이 살고 있어 신묘한 기분이 들었다.
왕과 왕후가 잠들어 있는 능침은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지만, 문화해설사의 왕릉 설명시간엔 잠시나마 능침을 가까이에서 둘러볼 수 있다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2시). 무인석·문인석등 능침을 지키는 석물 가운데는 동물도 있는데 당시엔 신성시 되었다는 산양과 호랑이가 눈길을 끌었다.
특히 석호는 무섭기는커녕 민화 속 호랑이마냥 친근한 표정을 짓고 있고, 등으로 말려 올라간 꼬리까지 재밌게 표현했다. 정자각 등 능 옆 한옥건물 지붕에 있는 잡상은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다. 맨 앞에 앉아있는 장수처럼 보이는 잡상은 조선판 ‘쩍벌남’이지 싶어 웃음이 난다. 경건하고 엄숙한 왕릉이지만 해학과 익살을 잊지 않았던 조상들의 성정을 느끼게 된다.
의릉은 능의 주인인 경종과 부인이 순탄치 못한 짧은 삶을 살다간 것과 같이 여러 고난을 겪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의릉이 다른 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고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다. 의릉은 수십년간이나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됐던 금단의 왕릉이었다. 1962년 초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故김종필씨는 의릉을 중정청사로 택한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당시엔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녔던 국가정보기관이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1996년 중정청사가 이전하면서 비로소 능은 시민들에게 공개된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청사 자리는 오롯이 의릉에 귀속되지 못하고 한국종합예술학교 건물이 들어섰다. 의릉은 중앙정보부 청사가 떠나면서 오랜 기간 복원공사를 해야 했다. 왕릉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과 정원·조명시설을 만들고, 능 한편에 축구장·테니스장을 조성하는 등 심하게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10년 넘게 인공연못을 없애고 금천교를 복원하는 등 정비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의능 둘레길을 걷다보면 옛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을 볼 수 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를 했던 역사성 때문에 등록문화재 제 92호로 선정됐다. 현재 시민들을 위한 각종 강연과 행사장으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