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하진 못할지라도

(8)

by 선이정

학교 다닐 때부터 문구 욕심이 많았다. 늘 큼직한 필통을 썼는데도 꽉꽉 차 있었다. 볼펜은 물론 형광펜까지 색깔 별로 갖고 다녔다. 나중엔 형광펜 필통을 하나 더 만든 적도 있다.


펜 좀 쓴다 하는 친구들은 비싸도 하이테크를 좋아했지만, 나는 그 약한 펜촉에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실 사용 횟수가 5번을 넘기 전에 교실 바닥에 떨어뜨려 애먼 쓰레기를 만들곤 했으므로. 내가 좋아했던 건 젤리롤 펜이었다. 펜촉이 두꺼워 필기엔 적합하지 않았지만, 사춘기 감성으로 편지 쓰기엔 그만한 게 없었다. 편지를 받은 한 친구가 내 글씨를 보고 정말 젤리처럼 톡톡 뜯어먹고 싶게 생겼다고 한 후로는 젤리롤을 더 애용했다. 물론 편지지 세트와 스티커도 잔뜩 사들여 꼭 집에 쟁여 놓아야 마음이 편했다. 이 학생은 훗날 여행지에 닿으면 엽서부터 사고 시작하는 어른이 된다.


학기 초가 되면 과목별로 노트를 한 권씩 사들였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노트 권수는 줄어들었지만 끝까지 노트 구입을 포기하지 않았다. 옥스퍼드 노트패드는 제대로 다 쓴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면서도 어쩐지 멋져 보여서 계속 샀다. 포스트잇은 언제나 3M 것, 원조로만. 잘못 사면 낱장이 날아다니는 험한 꼴 보게 된다. 욕심껏 샀는데 잘 쓰진 않았다.


어쩐지 ‘길티 플레저’인 아이템도 있었다. 어린 시절 선생님의 상징이었던 빨간색 돌돌이 색연필. 입시 문제집에는 복습을 위해 흔적을 적게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그래서 요즘은 아예 쓰고 나면 사라지는 기화 펜도 유행하지만) 나는 꼭 답 선명하게 체크하고 빨간색 색연필로 거침없이 채점해야 할 맛이 났다. 지금 와서는 너무 옛날 얘기인 데다가 좋아하는 이유도 어쩐지 좀 멋쩍어서 수줍게 말해본다.


아무튼 거칠게 요약하자면, 문구를 사기는 참 열심히 사는데 쓰는 건 적었다더라… 가 되겠다. 정작 매일 쓰던 건 샤프와 지우개 정도였는데, 하나 갖고 오래 쓰는 편이라 잘 사지 않았다.


학생 때도 그랬는데 직장인인 지금 문구를 잘 쓸 리 없다. 일은 컴퓨터로 하고, 할 일을 체크하는 것조차 어플로 하니까. 그러나 지금도 문구류를 사들인다. 고삐를 풀어준 것은 <아무튼, 문구>의 한 구절이었다. 노트를 잔뜩 들여놓는다는 저자가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을 인용한 순간 나는 무릎을 쳤다. 사실 <아무튼, 문구>의 저자의 삶과 내 삶은 매우 다르고, 꼭 내 무릎을 칠 이유는 없었지만… 원래 마음에 들어오면 다 내 얘기가 되는 거다. 나는 다시 필통을 채웠다. 다꾸, 폴꾸 등 온갖 ‘꾸미기’의 향연을 타고 스티커도 잔뜩 사들였다. 다이어리만 꾸미는 게 아니라 핸드폰 케이스, 사원증, 노트북 구석구석에도 붙였다. 마스킹 테이프는 즐겨 쓰지 않지만, 심심찮게 산다. 노트북 카메라를 가렸다 뗐다 하는 데 유용하다고 주장하면서.


작년에는 플러스펜 세트도 샀다. 학교 다닐 때 시험 볼 때면 OMR 카드에 주관식 답안을 플러스펜으로 썼는데, 필기감도 좋고 글씨도 예쁘게 써져서 마음에 들었지만 어쩐지 시험용 아이템이라는 느낌에 평소엔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 마음은 고스란히 내 안 어딘가에 남아있다가, 어른이 되어 색색깔의 세트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정작 그 시절 좋아했던 플러스펜 글씨는 한 번도 안 썼다. 자가격리자의 저녁, 컬러링북을 북북 긋는 데 유용하게 쓰고 있다.



그다음은 연필이었다. <아무튼, 연필>을 또 감명 깊게 읽었던 것이다. 특히 시를 쓸 때는 연필로 쓴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너무 멋져 보이는 것이다. 매끄러운 펜보다, 자판으로 입력하는 것보다 사각사각 소리를 남기며 연필로 쓸 때 생각도 좀 더 시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박수를 쳤다. 내가 시적인 사고를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점, 시를 1년에 몇 번도 채 쓰지 않는다는 점은 논외로 한다.


<아무튼, 연필> 저자처럼 빈티지 연필을 잘 알고 구하러 다니면 더 멋져 보이겠지만, 연필을 거의 쓰지 않던 내가 단숨에 거기까지 통달하긴 어렵다. 뭐든 입문은 간단하게 해야지. 문방구에 보이는 연필 몇 자루를 사보면서 시작했다. 영화 비평 수업 마치고 나오는 길에 있는 모닝글로리 직영 매장에서 다섯 자루, 실탄 사격 갔다 나오는 길 엄청 큰 알파 문구에 들어가서 파버카스텔 두 자루, 서울국제도서전 부스에서도 네 자루… 마음 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연필이 쌓였다. 연필 쓰는 속도에 비해 사는 속도가 과하게 빨랐다. 필사를 해야 하나. 없던 취미가 또 스멀스멀 개척된다. 머릿속에 셀프 알고리즘이 있는 것 같다. 이거 다음엔 그거, 그거 다음엔 저거… 로 차곡차곡 확장 일로를 추천해준다.



문구가 든든하게 채워지면 마음도 든든해진다. 꼭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런 문구들은 귀엽다. 요즘 가장 귀여워하는 것은 모닝글로리에서 산 삼색 펜이다. 일반 삼색 펜이 빨강, 파랑, 검정 혹은 초록의 조합인데 이 펜은 특이하게 검은색과 형광 두 색깔로 구성되어 있다. '쉽살재빙' 빙고를 채울 때마다 이 형광 볼펜으로 빗금을 긋는다. 빙고 판에도 스티커와 마스킹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였음은 물론이다.


문구를 잘 챙긴다고 자동으로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도, 일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뭘까? 내게 문구는 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즐거운 경험이고, 소소한 성취감을 측정하는 도구다. 학교 다닐 때 새 샤프심을 끼우며, 다 쓴 펜을 버리며, 포스트잇 마지막 장을 떼며, 돌돌이 색연필의 실을 당기며, 이걸 다 쓸 때까지 열심히 한 시간을 잠시 가늠했던 기분 좋은 경험들이 문구 곳곳에 자잘하게 남아 있다.


이 글의 기획안도 문구를 총동원해 즐겁게 썼다. 포스트잇에 연필로 슥슥 써 벽에 붙이고, 색연필과 색깔 펜으로 글자 위에 글자를 눌러쓰면서, 지루한 자가격리의 시간을 기분 좋게 승화했다. 귀여운 것이 세상을 구하진 못할지라도, 오늘의 내 기분은 구해줄 수 있으니까. 자가격리가 끝나면 문구 쇼핑을 한 번 가야겠다.


keyword
이전 07화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