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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희 Feb 25. 2024

제비꽃이 피면요, 전나무 밑에서 기다릴게요

카타야마 레이코, <숲으로 보낸 편지>

초록 눈을 한 다람쥐 님께     
안녕하세요? 호두나무 숲에서 같이 호두를 줍던 어린이인데요. 기억하나요? 내 손이 아주 크니까요. 또 호두 줍는 걸 도와줄게요. 다음에 같이 놀아요. 숲에 제비꽃이 피면요, 전나무 밑에서 기다릴게요.        히로코     

나는 어린이 책 만드는 일을 하는 편집자다. 8년 차 편집자이고 그림책을 만들기 시작한 건 4년 정도 되었다. 일을 시작하고 나는 이 일이 나의 적성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는 생각했지만 아주 좋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실은 나는 문학 편집자가 되고 싶었다. 늦게 갖게 된 꿈이고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조금 얕잡아 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더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그건 일을 잘 해내지 못할 때 휘두르는 핑계 같은 것이었다. 나와 더 잘 맞는 게 있을 거야,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야. 비겁한 태도였다.

그런데 요즘 점점 그림책이 좋아진다. 그림책이 좋아져서 잘 만들고 싶어졌다. 좋은 책을 만들려면 좋은 책을 많이 봐야 하고 그림책도 마찬가지다. 이 책 저 책 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나, 그럴 때 어떻게 표현했나. 그런 걸 둘러본다. 그런데 그렇게 찾다 보면 일과 관련 없이 그림책에 빠져들게 될 때가 많다.

이 책은 얼마 전에 알게 되었는데 ‘제비꽃이 피면요, 전나무 밑에서 기다릴게요, 호두 줍는 걸 도와줄게요. 내 손은 아주 크니까요.’라고 말하는 히로코의 마음이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내가 본 것은 그림책 박물관에 등록되어 있는 몇 페이지뿐이어서 당장 서점 어플에 들어가 책을 주문했다.

그리고 그날 생각했다. 좋은 직업을 갖고 있구나. 일을 위해서 멋진 그림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직업이 참 좋구나 느꼈다. 제비꽃이 피면 전나무 밑에서 기다릴게요,라는 글을 보는데 봄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까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있는데 이 문장이 그랬다. 최근에 본 몇몇의 좋은 그림책 덕분에 나는 내 일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잘해 봐야지.         

꼬리 아직 안 나왔어요? 내가 밟았을 때 깜짝 놀라 달아나지 않았으면 꼬리가 안 떨어졌울 텐데. 어디에 있어요? 걱정이 돼요.

히로코는 추운 겨울이 되자 밖에서 놀 수 없다. 그래서 동물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도마뱀에게는 지난번에 자기가 꼬리를 밟아서 꼬리가 잘렸는데 걱정이 된다고 지금은 어떠냐고 묻는 편지를, 새들에겐 다음엔 자기가 꼼짝 않고 서 있을 테니 자기에게 날아와 머물며 노래해 주지 않겠냐고 묻는 편지를, 민들레 들판에 새집을 지은 토끼에게는 놀러 가고 싶은데 어딘지 잊어버렸으니 봄이 와서 제비꽃이 피면 전나무 밑에서 기다리겠다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그 편지를 하나하나 전나무에 매달아 둔다. 어느새 전나무는 히로코가 매단 편지로 가득해진다. 주렁주렁 열린 편지를 보는 내 마음도 가득해졌다.

조용히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요. ‘아 그래, 전나무에게도 편지를 써야지.’ 히로코는 그렇게 말하며 집으로 돌아갔어요.

마음이 가득해져서 히로코의 마음을 소개하고 싶었다. 이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을 우리도 잃지 않았으면 해서. 추워서 놀 수 없다고 투정 부리지 않고 동물 친구들을 찬찬히 떠올리며 염려하고, 안부를 전하며 봄을 약속하는 히로코. 히로코는 기다린다. 어느 날 갑자기 따뜻한 바람이 불어서 제비꽃이 피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전나무 밑에 가서 기다린다. 그러나 제비꽃은 피지 않았고 전나무 밑에는 아무도 없다. 너무 이른 발걸음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히로코 집 앞에 도토리, 민들레 같은 선물이 도착한다. 그 선물들을 보고 히로코는 동물 친구들이 보낸 것이라 생각하고 숲으로 달려간다. 숲에는 이미 제비꽃 향기가 가득하다. 전나무 밑에는 초록눈의 다람쥐, 꼬리가 다 나은 도마뱀, 까만 귀의 토끼와 가족들 그리고 노래하는 새들이 히로코를 기다리고 있다. 푸른 전나무도 잎사귀를 흔들며 반겨준다.

와, 봄이 왔어!     

히로코와 친구들이 봄의 숲에서 행진하는데 내 책상 위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오늘 밖에 나가보니 봄 같았다. 왜 이렇게 봄 같지? 의아했는데 그러고 보니 벌써 2월도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새 봄이 훌쩍 다가왔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히로코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봄이 온다고 모든 일이 술술 풀릴 리 없지만, 상관없이 나는 봄을 기다린다. 그리고 나도 오랜만에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안녕, 잘 지내요?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당신의 안부를 묻는 편지,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는 편지. 편지의 마지막은 아마 이렇게 맺을 것 같다.

제비꽃이 피면요, 전나무 밑에서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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