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에게 무조건 공을 넘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트라우마란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남은 인생에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끼친다. 트라우마는 모든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기준이 된다. 마냥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주는 것만은 아니다. 트라우마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힘들어 하지만, 이 때문에 나중에는 더 좋은 선택을 하게 되기도 한다.
피부에 상처가 낫다가 아물면 흉터가 남더라도 그 부위를 만지면 더 이상 아프지 않다. 하지만 마음에 난 상처, 자존감에 난 스크래치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덜 생각나고, 덜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감각과 감정이 그 부위를 스쳐 지나가면 여전히 아프다.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에 난 스크래치도 그렇다.
그 자리에서 모욕감이 들게 하는 상대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서 오는 무력감은 자존감에 스크래치를 입힌다. 내가 나에 대해서 느끼는 자부심, 자긍심, 나를 구성하는 인테그리티(integrity)에 훼손이 가해지고 이 훼손의 기억은 머릿속, 마음속 어딘가에 아주 깊게 저장된다. 타인의 불쾌하고 폭력적인 언행 때문에 나의 근간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의 존엄성이 훼손되었다는 기억,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방치했다는 무력감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때로 우울해지고 화가 난다.
훼손의 기억에서 조금이라도 해방되려면 가해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나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남학생이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으니 트라우마를 입히고 나서 몇 년 후에 다른 학원에서 우연찮게 마주쳤다. 그때 마주친 눈빛에서 죄책감을 보았다. 둘 사이에 아무런 일이 없었고 몇 년간 두세 번 같은 반이었지만 그리 친하지도 않았다. 괴롭힘은 일방적이었다. 어느 날 비뚤어진 마음의 타깃이 되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죄책감의 눈빛을 보았다고 해서 용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면 트라우마는 훨씬 더 깊고 아팠을 것이다.
나에게 트라우마를 준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죄책감을 가져야 한다. 어떤 언행 때문에 누군가가 고통받는다는 것, 고통받았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 하고 두 귀로 명확히 들어야 한다. 그리고 가해자가 자신이 한 행동을 인지한다는 것을 내가 알아야 한다.
학교 폭력 가해자나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들은 괴롭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괴롭힌다. 그러니까 모를 수는 없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해서 본인들이 괴롭힘을 행하고 있다는 것조차 외면하고 부인한다. 어떤 정당한 이유가 있고, 합당한 논리가 있다며 스스로가 만든 논리 뒤에 숨어버린다. 이럴 때도 고통을 꺼내서 보여줘야 하고, 고통받았다는 것을 말이나 글, 행동으로 꺼내어 감각으로 느끼게 해줘야 한다.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법에 호소하기라도 해야 한다. 죄책감을 못 느끼더라도 타의로라도 사과문에 서명이라도 하게 해야 하고 처벌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괜찮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잘못을 인지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느냐인데, 직면할 용기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법으로라도 다스려야 한다.
학교나 직장에서의 괴롭힘은 그래도 명확하고 어느 정도 법의 보호 아래 있다. 밖에서 만난 사람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사건을 겪었다면 어떡해야 할까? 이때도 공을 무조건 상대방에게 넘겨야 한다. 그 당사자에게 명확하게 어떤 언행 때문에 내 감정이 어땠는지를 전달해야 한다. 자신의 행동을 직시하고 가책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내가 혼자 공을 들고 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트라우마 제공자에게 직접 불쾌함을 전달하고 공존하는 영역에서 내보내 버려야 한다. 선을 넘었다면 돌이킬 수는 없다. 트라우마를 주었던 상대와 같은 공간에 공존할 수 있을까? 사과를 받는다고 한 공간에 있을 때 내 마음이 괜찮을까?
답은 No 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