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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Apr 01. 2024

꽃이 피면 뭐 하나

사랑할 대상을 잃은 T의 우울

진달래 동산에 갔는데 꽃분홍색의 꽃을 봐도 아무 감흥이 없다. 데이트 없으면 주말에 하루종일 집에서 배달음식 시켜 먹고 썬베드 모양으로 템퍼 모션베드와 한 몸이 되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햇볕도 안 쬐고 사람도 안 만나면 더 다운되니까 친한 오빠가 운영하는 걷기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땀나고 숨차는 가벼운 산행과 걷기를 포함해 2시간 정도 걷는 것인데, 비탈길을 걸으며 발목이 다양한 각도로 기울어지고 흙 밟고 나무보고 가끔 새도 보는 것이 즐거워서 일주일 내내 도심 속 숲 속에 들어가는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핵길치인데 미리 답사 다녀온 길을 그냥 따라다니면 되니까 너무 안전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전에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가볼까 했다가 망설였던 이유이기도 한데, 때로 무리의 수다 또는 어느 선무당의 가르침(시와 때를 가리지 않는 한국인들의 부동산 가격 얘기, 경제와 주식시황에 대한 일장연설, 여자들의 흔한 수다 등)과 그 소음을 감내해야 하는 단점이 있지만, 무리 지어 다니는 사람들과는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고, 대화를 나누더라도 가장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과만 가벼운 대화를 나눌 생각으로 나가서 아직까지는 크게 불편하지 않다.


5년째(작년에 5년째였으니까 아마 더 되었을 것 같은) 솔로인 친한 오빠는 이 모임에 모든 휴식시간을 갈아 넣는 것인지, 연인과의 데이트 대신 만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그룹 데이트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인지 3차에 거친 꽃구경 릴레이를 기획했다. 3주간 완벽한 개화시기와 장소까지 맞춰야 성공할 수 있는 노력과 발품, 날씨 운까지 다 맞아떨어져야 하는 이벤트이다.


그 꽃들의 전쟁 1차 이벤트로 부천에 있는 원미산에 갔다가 하산하면서 진달래동산으로 내려왔다. 그동안은 조용한 산이나 둘레길만 가서 엄청난 인파에 놀랐다. 꽃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보다는 원래 뭐든 한 번 참석하면 웬만하면 계속 참석하는 경향이 있어서 나갔다.


리액션이 원래 좋은 편인데,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흔적이라도 남아있었던 텐션은 어디 갔는지, 올봄에 새로 올라온 꽃을 보는데, ’꽃이구나‘, ’피었구나‘, ’진분홍색이구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많이도 모였구나’ 싶었다.


꽃과 함께 사진 찍는 사람들을 보며 봄, 가을마다 올림픽공원에서 엄마 사진 찍어주던 생각이 나서, 마침 같이 온 모녀들도 있길래, 엄마 찍어주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 외에 같이 보고 싶은 사람도 떠오르지 않고, 딱히 사진 찍어서 공유해 줄 사람도 없어 그냥 ‘꽃이구나‘ 싶었다.


오빠가 “T라서 꽃을 봐도 감흥이 없어?”라고 하길래, “꽃이구나.”가 T의 마음이라고 했다. T, F 반반치킨인데 사랑을 쏟을 사람이 없으면 그냥 T인가 보다.


그래도 필터를 적용하니 카메라로는 더 예뻐 보여서 풍경 사진은 몇 장 찍었다.



그날 아주 오랜만에 주말에 종종 하던 독서모임도 있어서 부천에서 강남으로 넘어갔다. 독서모임 사람들도 작년부터 봐서 편하고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이라서 힐링되고 좋았다.


치킨을 먹고 들어왔는데도 불구하고,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고 허니버터칩 콰트로치즈맛과 어릴 때 먹던 요구르트를 확대한 것 같아서 너무 귀엽게 느껴지는 중간 사이즈 요구르트를 먹었다. 어제 먹다가 넣어 놓은 나뚜르 초콜렛 아이스크림도 마저 더 퍼먹었다.


내가 느끼는 마음이 외로움, 쓸쓸함이구나 싶었다.


오빠한테 이번 주에 뭔가 우울했다고 하니까, 비가 많이 와서 햇볕을 못 쬐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묘하게 수긍이 되는 T스러운 반응이었다. ‘아. 햇볕 탓이구나. ’ 싶었다.


사람들을 만날수록 더 외롭다. 혼자 있으면 쓸쓸하고 우울할까 봐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도 오히려 더 쓸쓸하다. 나에게만 집중해 주고, 꽃 보러 가면 내 사진 찍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친한 오빠도 천하제일 까다로운 내 기준을 통과하는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옆에 있으면 너무 편하고 좋지만 그래도 꽃은 사랑하는 사람과 보러 가야 한다.


남은 두 번의 꽃구경 이벤트를 참석할지, 그리고 만약 참석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지 모르겠다. 산행하고 꽃 없는 길을 걸을 때는 ’독서모임에다가 걷기 모임까지 하면 굳이 연애가 필요없겠는데?‘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목적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 지금의 나처럼 결혼해야지, 가정 꾸려야지라는 생각만 접으면 굳이 피곤하게 마음 졸이며 연애할 필요도, 욕구도 못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아니다. 꽃 같은 것을 보고 감흥을 느끼려면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고 1:1 데이트와 연애는 필수다.


진짜 우울한 이유는 열정이 안 생기고 몰입이 안되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그래, 한국에서 외국인 만나보자 했는데, 서울에 정착해서 살고 있는 외국인도 별로 없거니와, 안정감 줄 수 있는 사람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외적으로 외국인한테 더 끌리는 것도 아니어서 안정감 줄 수 있는 한국인도 좋은데, 마마보이 아닌 공감능력 좋고 지적인 대화되고 유잼인 한국인도 잘 못 찾겠다.


내가 원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할 사람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년에 일을 쉬고 어디론가 떠나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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