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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이 Feb 07. 2023

노장은 살아있다.

제게 인사하지 마세요.

출장을 다녀온 후 특이한 메모를 발견했다. 모델 출신 어르신 상담 요망!이라는 쪽지에 전화번호가 있었다.

"선생님 이게 뭐예요?"

"아, 아까 전화 왔는데요, 옛날에 모델했던 분이신데 일자리 문의 하고 싶으시데요."

"설마, 모델일을 구하시는 건 아니시죠?"라며 흔치 않은 일이라 괜한 농담을 던졌다.

다행히 h할아버님은 상담직이나 사무직을 원하신다고 했다. 곧 이력서를 가지고 방문하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h어르신을 만나기 전까지  그 약속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구직홍보를 위해 출장을 다녀오던  정오쯤이었다. 흩뿌리는 빗줄기에 저녁처럼 어둑해서 마음마저 왠지 의기소침해지는 날씨였다. 오랜만에 펼친 우산에서 쾌쾌한 냄새가 났다. 당장 퇴근해서 따듯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는 순간 머스크향의 향수냄새가 무안하게 안겨왔다. 상담책상 앞에는 완벽하게 백발인 노신사가 앉아계셨다. 바탕 좋은 피부에서 윤기를 발하고 있어 백발머리카락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풍기게 했다. 나도 모르게 노신사의 차림새를 살폈다. 연회색의 캐시미어 티셔츠에 베이식한 재킷을 입으셨다. 팬츠는 코듀로이 소재로 티셔츠색깔에 브라운이 살짝 가미되어 톤앤톤의 조화가 세련되어 보였다. 그리고 무심한 듯 어깨에 걸친 **브랜드의 머플러. 누가 봐도 모델포스가 작렬하는 멋쟁이 신사였다. 보자마자  h어르신이라는 걸 직감했다. 

"안녕하세요. 취업알선 담당자입니다. 오시느라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뇨, 그래도 한 번에 오는 버스가 있어서 다행히 힘들지 않았어요."

저음의 동굴목소리가  멋지셨다. 어르신의 이력서를 보니 여러 가지 광고를 많이 찍으신 것 같았다.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은 중소기업의 광고들이었지만 소소하게 돈벌이도 되셨고. 그러다가 서서히 일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모델일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하셨다.

말씀을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내가 주로 알선하는 일들은 경비나 아파트 외곽청소와 같은 육체적 노동이 필요한 일들 뿐이다. 물론 노인구직자들의 경력과 니즈에 맞는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어르신들의 젊은 시절 경력을 인정해 주는 곳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과거에 선생님이셨건 회사의 임원으로 활약하셨건 간에 경력대로 일자리를 구하기는 아주 힘들다. 실제로 노인인력을 원하는 수요처는 종류는 다분히 한정적이다. 


"그런데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하루에 반나절을 주 5일로 그리고 버스로 20분 내외에 사무직을 찾는다는 건 아주 힘든 일이에요. 어르신께서 차량을 운행하고 다니신다면 좀 나을 수도 있지만요. 댁도 시외라 교통편도 좀 어려운 면이 있으시네요. 지금 빠르게 구해드릴 수 있는 일자리는 경비직, 공장에서 생산직을 하시거나 마트에서 배달하는 일이네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기는 할 건데요. 시간이 많이 걸리실 수 있겠어요." "고마워요. 무조건 안된다고 말하지 않아서요. 아마 사실상 불가능하겠죠? 아, 잘할 수 있는데...."

그저 많이 아쉽다는 마음을 담은 미소를 지으셨다.  어르신은 의외로 덤덤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바닥에 내려놓으셨던 명품가방을 책상에 세우고, 자연스럽게 한 쪽팔을 걸치셨다. 상체는 가방을 향해서 15도 각도로 살짝 트시더니 핸드폰을 들고 후레시를 터트리기 시작하시는 게 아닌가!

어르신의 턱선은 단 몇 도의 단차로 시시각각 움직였고, 한동안 구직신청 기념촬영은 계속됐다.

포즈 역시 물 흐르 듯 자연스러우셨다. 다만 바라보던 우리의 표정이 상당히 어색했을 뿐이다.


그렇게 어르신은 이름을 묻고 싶은 향수냄새를 남기시고 돌아가셨고, 나는 한 동안 모델직을 찾는 구인광고를 뒤적이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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