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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우비 Jun 26. 2024

도쿄, 마지막 날은 역시 쇼핑이지!

도쿄를 퀴어하게 여행하는 법 7

마지막날의 조식은 100엔 할인권을 받았던 킷사텐 <Coffee Aristocrat Edinburgh>에서, 역시 같은 메뉴를 먹었다. 그런데, 저 이름... 카페 이름으로 너무 어렵고, 기묘하지 않나? 에든버러의 귀족이라니. 혼란하다, 혼란해...다나카가 오죠사마를 나긋하게 불러줄 것 같은 이름인데, 어쩐지 시부야의 카페는 그래도 될 것 같아 납득!

 우리 숙소는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언어의 정원>의 주무대인 신주쿠코엔에 가까웠다. 때마침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신카이 마코토의 미학을 체험하기에 딱 좋은 조건. 정말 가고 싶었지만 새끼발가락이 탈이 나서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발볼이 상당히 넓은 편인데, 군대에서 주어진 좁은 군화를 신고 다니는 바람에 발가락을 오므리고 걷는 버릇이 생겼고, 덕분에 새끼발가락이 취약해졌다. 무리해서 걷다 보면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곤 하는데, 보통 2만 보는 걸어야 하는 게 여행자의 숙명 아닌가. 이번 여행에서는 여러 가지로 조심한다고 했는데, 하루에 만 오천보 이상씩 3일을 지속하고 나니 결국 누르면 아얏 소리가 나올 만큼 새끼발가락이 아파왔다.

다시 말하면, 그만큼 쇼핑하러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다.

첫날 이미 나카메구로와 다이칸야마를 정리한 우리는, 둘째 날은 축제 부스를 돌아다닌 후, 캣스트리트에 들어섰다. 우리가 좋아하던 브랜드 매장이 다 없어졌지만, 그만큼 새로운 것들이 많겠지, 기대감에 도착한 캣스트리트는, 전성기시절 중국인들에게 점령당했던 서울 명동 거리, 딱 그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흥미를 끄는 매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쇼핑을 하고 싶은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인간 쓰나미. 그렇게 표현해도 될라나? 부산 촌놈에게는 무서울 정도였다.

문 열기 전부터 이 난리. 뭐가 그렇게 탐이 날까 궁금하다.

사람마다 옷을 살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를 것이다. 브랜드가 우선인 사람, 옷 자체가 중요한 사람, 가게 분위기를 따지는 사람, 직원과의 관계, 한정판인지 아닌지, 가격, 아니면 그냥 갑작스러운 충동구매 등등.

오스씨와 나는, 옷을 아주 좋아하지만, 옷에 "열광"은 하지 않는다. 그 선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안 그러면, 음... 난리가 나니까. 그래서 일단 사람이 많이 모이면 패스한다. 열광하는 무리에 속해 있으면 마구마구 사게 된다. BTS에 열광하는 아미(army) 무리에 있다 보니 한번 보고는 처박아둘 콘서트 블루레이 한정판을 거금 주고 사게 되는 것처럼.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옷 그 자체보다, 그 옷을 사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방문했는데 인테리어가 아주 멋있고, 점원은 친절하고 옷에 해박하여 내가 고른 옷의 소재나 제작 방식, 브랜드의 추구 목적 등을 설명해 주고, 막상 입어보니 별로라서 그냥 사지 않고 나와도 웃음을 계속해서 보여주어서 기억에 오래 남은 가게를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이후 그 가게에 또 들러 이번엔 맘에 드는 옷을 골라 사고, 회원가입까지 해서 포인트를 적립하는 것. 그 과정이 즐겁다.

한편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을 머릿속으로 나열해 보고, 그와 어울릴만한 아이템을 사서 상상 속에서 옷 갈아입히기 놀이를 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나의 쇼핑은 사실 대부분 아이쇼핑과 상상 속 쇼핑이다.

"내가 싫어하는 게 그거야. 안 살 거면서 들어가서 이것저것 입어보는 거."

오스씨는 질색팔색 한다.

그의 쇼핑 과정은 이렇다. 옷장 문을 열어보고 가진 옷들을 주욱 살펴본 후, "노란색 바지가 필요하군." 결론짓고, 백화점이나 로드샵에 가서 노란색 바지를 찾는다. 찾으면 사고, 없으면 안 산다. 그는 "현물"을 원하고, 나는 "경험"을 원한다. 이 약간의 차이 덕에 우리는 서로의 쇼핑에 일정 정도 경찰관 역할을 하게 되고, 그 덕에 아직 파산하지 않고 살고 있다.

기대했던 캣스트리트와 하루주쿠에서 인파에 겁먹고 도망친 탓에 우리가 득템 한 제품은 빔즈나 쉽스 같은 편집매장에서 판매하는 바지 하나, 커플 티셔츠, 양말 한 짝 정도였다. 결국 우리의 승부수는 마지막 날, 대망의 이세탄 백화점이 되어버렸다.

숙소에서 이세탄 맨즈는 걸어서 십 분 정도여서 숙소에 짐을 맡기고 오픈 시간에 맞춰 백화점을 갔다. 남들이 "열광"하는 제품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일본 브랜드 매장엔 들르지 않고 곧바로 6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엔 우리가 좋아하는 아메카지는 없지만, 새롭고 신선한 디자인의 옷들이 많아서 구경할 맛이 난다. 다양한 브랜드가 포진해 있지만, 역시 요즘 대세인 고프코어룩이 눈에 띈다. 가볍도, 편하고, 건강해 보여서 다 좋은데, 가지고 있는 옷이랑 하나도 안 맞다. 가격도 비싸! 결국 우리가 골라야 할 소재는 면! 면! 면!이다.

좋아하는 브랜드가 여럿 있어서 신나게 아이쇼핑을 했다. 나나미카 옷도 적은 양이지만 걸려있었는데, 첫날 내가 산 폴로셔츠도 있었다. 막 포장지를 뜯어서 걸어뒀는지 잔뜩 구겨진 채였다. 다이칸야마 매장에서 볼 때완 느낌이 너무 달라, 아마 여기에서 처음 보았다면 절대로 사지 않았을 것이다. 옷가게는 확실히 꿈을 파는 공간인 것 같다.

결국 우리가 건진 옷은,

1. 깜짝 놀랄 만큼 예쁜 검은색 저지 반바지.(허리가 너무 큰 걸 샀다. 걸어 다녀보니 줄줄 흘러내렸다. 동네 수선집에서 허리를 줄였더니 이쁜 핏이 망가졌다. 새 옷인데 2년 이상 막 입은 느낌. 슬프다.)

2. 다이칸야마에서 안 산 '마가렛하우웰(MHL)'의 약간 두꺼운 면티셔츠 2장(색깔별로 다 사 올 걸, 후회할 만큼 최고의 핏을 보여줬다.)

3. '언더커버'에서 산, 십자가가 커다랗게 수놓아진,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오버사이즈 티셔츠(입으면 뽈록 나온 배가 도드라져 보인다고 말렸지만 오스씨는 뭔가에 홀린 듯 결제를 했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우리가 산 옷들은 모두 면세가 되는 것들이라, 면세카운터에 줄을 서서 할인을 받았다. 이세탄게스트카드로 5% 할인까지 받고, 네이버페이로 결제하면 또 할인해 주고, 아무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나름 저렴하게 구입해 만족스럽다.

독특하고 신박한 아이템을 쓸어와서 옷장에 새 바람을 일으키자 다짐하며 왔지만, 결과적으로 바지 세 벌, 티셔츠 5장 정도가 다였다. 한국에서 사도 될 정도의 양과 가격. 어쩐지 도쿄는 쇼핑 스폿으로서의 매력이 조금 떨어진 느낌이다. 사람만 많고, 인터넷에서 본 사진들에 비해 실물은 그다지 산뜻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가 늙어서 입을만한 옷들이 없어진 거 아닐까?"

"우리가 손 대기엔 너무 비싸거나."

이게 정답일세. 주머니에 남은 일본돈을 보니, 이대로 그냥 도쿄를 떠나기엔 너무 아쉽다. 이세탄 멘즈를 나오면 바로 유니클로 매장이 나온다. 후다닥 뛰어들어가 팬티와 난닝구를 쓸어왔다. 가뜩이나 싼 에어리즘인데, 한국보다 더 싸니, 이건 뭐 물 만난 고기가 된다. 그제야 뭔가 제대로 쇼핑한 느낌이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넥스를 타고 공항에 왔더니, 츨발까지 세 시간이 남았다. 지난번 스키여행에서도 느꼈지만, 저녁 시간의 나리타공항 3 터미널은 아주 썰렁해서 한국인의 일본여행 열기를 느낄 수 없다. 괜히 일찍 왔다. 남은 시간 동안 공항 쇼핑을 좀 하고, <딘앤델루카> 매장에 앉아 노트를 꺼내 이 여행기를 마무리하고 있다.

일본에 와서 이렇게 '퀴어한 행동'을 많이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예약해서 먹은 식사도 채식전문요리점 코스요리였다. 우리 주위에서 채식과 퀴어는 서로를 응원하는 관계다. 퀴어 축제에 참석하고, 퍼레이드에 갤러리로 참여해 열띠게 응원하고, 3일 내내 게이바 탐방에 나서, 일본 게이들을 지긋지긋하게 봤으니, 이번 여행은 계획한 것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할 수 있다.(쇼핑은 솔직히 실패다!)

그렇다면 내년에도 도쿄 퀴어축제에 참여하게 될까?

만약 동일한 시기에 하게 된다면 참석하기는 힘들 것 같다. 내년 이맘때 우리는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일들을 하기로 결정한 상태고,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시기에 다른 나라에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일본 게이들! 멋진 축제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 주길! 내년엔 부디 동성결혼 합법화 기념 축제가 될 수 있길!

응원하겠다.

간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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