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시각인 자정이 되자, 하늘은 마치 댐이 무너진 듯 비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공사 현장의 동쪽 구역, 서연과 케일럽이 서 있는 '붉은 매'의 무덤 터에는 빗방울 대신 끈적하고 매캐한 붉은 흙먼지 폭풍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시작해... 케일럽!"
서연의 외침이 폭풍우에 묻힐 듯 작게 들렸다. 케일럽은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파헤쳐진 구덩이 위로 뻗었다. 뚝, 뚝. 배신자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선명한 핏방울이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와라! 네가 원하는 피가 여기 있다!"
케일럽의 절규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쿠르릉-!
땅이 지진이 난 듯 요동치더니, 구덩이 안에서 붉은 진흙이 간헐천처럼 솟구쳐 올랐다. 솟구친 진흙은 공중에서 뒤틀리고 뭉쳐지더니, 이내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악령의 형상을 갖췄다. 썩은 깃털 장식, 텅 빈 눈구멍,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증오. 전설 속의 추장, '붉은 매'가 현신한 악령이었다.
"크아아아-!"
악령의 포효와 함께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서연과 케일럽은 뒤로 나뒹굴었다. 하지만 악령은 그들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바닥에 흩어진 흙더미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진흙탕 속에서 사람 크기만한 기괴한 인형들이 비틀거이며 일어났다. 악령의 하수인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케일럽을 향해 덤벼들었다. 진흙으로 빚어진 몸이었지만, 익숙한 작업복 조각이 흙 속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진흙 틈새로 보이는, 초점을 잃은 흐린 눈동자.
"할...아버지...?"
케일럽이 얼어붙었다. 흙인형은 실종되었던 빌리였다. 악령에게 영혼을 잠식당해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빌리는 짐승 같은 괴성을 지르며 손자의 목을 조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으윽! 할아버지! 제발... 저예요, 케일럽이라고요!"
케일럽은 바닥을 구르며 빌리의 공격을 피했다. 빌리의 흙투성이 손이 케일럽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살점이 뜯겨나갈 듯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케일럽은 차마 반격할 수 없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빌리의 흐릿한 눈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우리가... 끝내야 하잖아요..."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손자의 눈물을 본 빌리의 흙인형이 멈칫했다. 살기로 가득 찼던 손아귀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탁해진 눈동자에 아주 잠시, 인간으로서의 이성과 깊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도...망...쳐..."
빌리의 입에서 흙 가루와 함께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악령의 분노를 샀다.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하수인을 본 거대 악령은 끔찍한 굉음을 질렀다. 악령이 손을 휘두르자, 바닥에서 날카로운 흙의 창이 솟구쳐 올라 빌리의 몸을 관통했다.
"안 돼!!!!"
케일럽의 비명 속에, 빌리의 형상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손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손을 뻗는 듯하더니, 이내 한 줌의 붉은 흙먼지가 되어 폭풍 속으로 흩어져 소멸해버렸다.
"크르르르..."
자신의 피조물을 없애버린 악령은 이제 방해물이 없다는 듯, 케일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케일럽은 충격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악령의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이대로라면 덫을 발동시키기도 전에 모두 죽을 판이었다.
그때, 날카롭고 맑은 피리 소리가 전장을 가랐다.
삐이이이-!
서연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붉은 매'의 유물인 하얀 뼈 피리를 불고 있었다. 피와 살육에 젖지 않은 순수한 소리. 그것은 악령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소음이었다.
악령이 괴로워하며 머리를 감싸 쥐더니, 고개를 돌려 서연을 노려보았다.
"이리 와!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서연은 피리를 꽉 쥐고 소리쳤다. 그녀는 일부러 덫의 중심부, 구덩이 바로 건너편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자신을 미끼로 던져 악령을 덫 위로 유인하려는 것이었다.
"순수한... 영혼..."
악령의 시선이 케일럽에게서 서연에게로 옮겨갔다. 놈은 탐욕스러운 침을 흘리며, 순식간에 서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폭주 기관차 같은 속도였다. 붉은 흙먼지가 해일처럼 서연을 덮쳐왔다.
"지금이야! 케일럽!"
서연이 바닥에 몸을 던지며 피했다. 악령의 거대한 손톱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령의 발이 정확히 구덩이 위, 나코마가 말한 '영혼의 덫'의 중심에 닿았다.
정신을 차린 케일럽이 핏발 선 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할아버지를 잃은 분노를 담아, 미리 준비해둔 소금 자루와 자신의 피가 묻은 쇠말뚝을 동시에 구덩이 주변의 혈(穴)에 박아 넣었다.
"돌아가! 네가 있어야 할 지옥으로!"
쾅! 콰앙!
말뚝이 박히자, 바닥에 그려놓은 거대한 소금 원이 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결계가 악령의 발목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악!"
악령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결계는 놈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늪처럼 놈을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령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놈은 반쯤 땅에 파묻힌 상태에서도 거대한 두 팔로 땅을 짚고 버텼다. 덫의 힘과 악령의 저항이 충돌하며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케일럽이 박아 넣은 말뚝이 튀어 오르려 했다. 힘이 부족했다. 악령이 다시 기어 나오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케일럽이 말뚝을 붙잡고 버텼지만, 역부족이었다. 악령의 붉은 눈이 승리를 확신하며 번득였다.
그 순간, 서연이 달려들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의 나약함을, 이 모든 비극을 끝내겠다는 '순수한 의지'로 바꾸어 악령의 면전에 들이밀었다. 그녀는 품에 있던 뼈 피리를 악령의 미간, 붉게 타오르는 그 제3의 눈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리꽂았다.
"이건, 이 땅의 눈물을 위한 거야!"
푸욱!
순수한 유물이 악령의 이마에 박혔다. 정화의 힘이 악령의 핵을 찔렀다. 악령의 움직임이 멈췄다. 붉은 폭풍이 일순간 정지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케일럽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봉인의 주문을 완성했다.
"닫혀라, 영원히!"
눈부신 섬광과 함께, 거대한 붉은 소용돌이가 구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최후의 비명, 그리고 처절한 저항이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의지가 만든 덫은 견고했다.
쿠구구구...
마침내, 악령의 마지막 손가락 끝이 흙 속으로 사라졌다. 미친 듯이 몰아치던 붉은 흙먼지 폭풍이 거짓말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사투는 끝났다. 빗줄기만이 고요해진 전장 위로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