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마스크를 잔뜩 쟁여놓게 했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세가 한풀 꺾였다. 한국 입국 시 필요한 방역규제가완화되자마자.미국으로 출국 이후 약 3년만에 인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미국까지도 나를 쫓아온 세월 때문에 미국 갈 때는 멀쩡했던 무릎에서 지릿지릿 소리가 난다. 무릎을 문질문질, 퉁퉁 치다가 자다가, 또 지릿지릿하는 사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코로나 백신주사를 3+1번을 맞고 받은, 백신기록증을 신분증처럼 들고,비밀요원처럼 마스크로 온 얼굴을 가리고 체온 감지기계와 몰래눈싸움을 하고, QR코드로 방문기간 동안 머무는 곳 등록을 하고 있으려니여기가 디스토피아가 배경인 영화 속인가 싶은 느낌이었다.그렇게 3년만에 다시 한국을 찾아가는 길은 MBTI의 T스럽고 J스러웠다.한국과의 3년 만의 상봉은 좀 F스럽고 P스러울 거라 기대했는데.
공항 도착시간인 오전 5시에 맞춰 부모님과동생이 마중 나오기로 했다. 오전 5시까지 공항에 오시려면 집에서 4시엔 출발해야 하고, 그러려면 적어도 3시 30분에는 일어나셔야 하고, 그럼 전날 저녁엔 또 일찍 주무셔야 하니, 일이 크다. 오시지 말라고 할까? 하지만 오시지 말라고 한다고 오냐 하실 것 같지 않아서,"조심히 오이소."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한 달간 혼자 집에 남겨진 남편에게도 '잘 도착했어. 밥 굶지 말고."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가방을 찾고 입국장으로 나갔다.
드르륵, 입국장 문이 열리고,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간절히 보고 싶던 이가 나올 때 배경으로 나오던 음악을 흥얼거렸다. 나에게만 들리는 그 음악소리에 걸음의 속도를 맞추고 있던 그때, 바로 전방에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순간,방금까지 입국 절차를 밟느라 붙들고 있었던 긴장줄이 탁 풀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부모님의 성성한 백발이었다. 미국에서도 한 달에 한번 영상통화를 통해 우리는 만났고, 그래서 부모님의 머리가 백발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아왔지만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많이 속상했다. "강경화장관도 백발인데 멋있고, 그 머시기도염색 안한다더라.백발도멋있어."라고 세월 야속해하는부모님을 줄곧 위로해 드렸었기기에 심장 무너지는 소리를 숨기고,
"이야~ 백발 실제로 보니까 더 멋지시네."그랬다. 흐르는 눈물을 눈 뒤로 다시 꿀꺽 삼키려고 애쓰며.
눈가가 발그스레한 아빠가 아무 말씀이 없으신 동안, 우리 엄마.
"니 와이래 눈이 퀭하노. 주꾸지비 사촌처럼 와이래 얼굴에 살이 없노. 미국이 밥 안주드나. 피부는 와이래 푸석푸석하노. 로션 안바르나. 아니고마."
폭신폭신한 악플을,속사포처럼, 실명으로 내 면전에 쏘기 시작하셨다.
미국서 곧잘 챙겨보는 동양계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생각났다. 자녀에 대해 매우 솔직하고, 매우 비판적인 동양엄마들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그들이 말하는 그 엄마가 내 눈앞에 있다.
당신들이 말하는 현실모녀가 여기 있다!
너무 늦기전에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 함께하는 시간을 갖겠다며 왔고, 한달정도를 꼬박 친정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잘 할 수 있을까? 나와 엄마는 둘 다 무뚝뚝해서 내가 어릴 때부터도 잘 부딪히고 퉁퉁거리는 사이였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달라질 수 있을까?
사춘기 페르소나에게 나대지 말아 줄것을 부탁해 본다. 너 마흔 중반이야. 잊지 마.
갱년기 페르소나에게도 나대지 말아 줄 것을부탁해 본다. 갱년기 대선배가 여기 계셔. 잊지 마.
인천공항에서 친정집으로 가는 길, 좀 전에 입국장에서 터졌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망가져도 스스로 다시 모양을 찾아가는 기억합금 같은 무뚝뚝DNA가잃었던 제 모습을 찾아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차창을 열자 간밤에 내린 비로아침공기가 싱그럽다. 그날부터 한 달 동안 딸은 효도하겠다고, 엄마는 자식 챙겨 먹이겠다는 동상이몽의 목표로 각자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