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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Oct 22. 2020

어린 사랑(2)

E02. 뿔테낀 백숙

https://brunch.co.kr/@supereunkyung/121


연애, 해보고 싶긴 했다.

주변에 소위 "논다" 하는 일진 애들은 달랐다. 우리처럼 부모가 사준 교복 그대로 입고 다니는 애들이야 급식 오빠 염탐하는 것에 그쳤지만, 가슴팍 단추가 터지기 직전까지 블라우스 줄여 입고 다니는 애들은 한참 연애로 바빴다. 바쁠 수 밖에 없어 보였다. 학교 일진회 여자애들은 남중 일진회 전원을 번갈아 가며 사겼다. 내일이면 내가 사랑한 네가 내 친구와 사귀고 있겠지, 그리고 나는 친구 남친이던 이진과 손 잡고 있겠지, 대충 이런 식의 연애랄까. 좀 대단한 사랑이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그게 일진의 사랑 방식이라니 그런가보다 할 뿐이었다. 이별과 새 만남의 주기도 좀 잦았던 걸로 기억한다. 한 달 전 22라고 200원 준거 같은데, 오늘 내 자리에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 오늘 투투얌. 200원만 줘."


이만하면 동냥이었다.

사귄지 22일을 기념해 200원씩 받아가는 모습은 당시 아이들에게 퍼져있는 일종의 풍습과 같았다. 때문에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머니 짤그랑 거리던 200원 꺼내 축하한다며, 예쁘게 사귀는 게 뭔진 모르지만 어쨌거나 예쁘게 잘 사귀라며 마음까지 더해 건넸다. 혹시나 급식오빠랑 사귀면 나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긴 했다. 준 만큼 받아낼 거라며, 나도 구걸할 것을 벼루었다. 야곰야곰 200원씩 몇 번을 축의했는지 모른다. 그 사이 급식오빠는 알바를 때려쳤고 그렇게 얼마를 뜯기는 동안, 나는 한 번의 22도 맞지 못했다.


대학생이 된 나는, 사귄지 22일 되어도 200원이 뭐야 2,000원도 삥뜯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다만 100일쯤 되면 남친과 단 둘이 소소한 특별함을 보내고 싶다, 생각했다. 케잌에 초는 불고 싶다. 커플링도 하나 했으면 좋겠고, 사귄지 100일째는 백이라는 숫자에 맞춰 백년가약을 약속하면 좋겠다,는 꿈도 꿨다. 히힛.


"자랑스런 대 세기 대학교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입학식 총장의 인사가 끝났다. 단과대가 있는 강의실에 가보기 전, 수강신청 관련 질문이 있어 조교실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질문거리가 많았다. 고등학생땐 온종일 한 자리에 앉아 정해진 커리큘럼 따라 매 시간마다 다른 교과서만 펼치면 그만이었는데, 선생이 학생을 찾아 오는 시스템이었는데, 대학생은 좀 다른 모양이다. 분명 같은 과목인데 교수 이름이 서너개 있기도, 선택 혹은 필수 사항이 정해져 있기도 했다. 모든 게 생경한 하루다.


"(똑똑)계세요?"

"어쩐일로? 수강신청 때문에?"

"안녕하세요. 10학번 신입생인데요. 네. 수강신청 때문에.."


왠 남자 하나가 책상 위로 얼굴만 동동 띄운 채 대답하고 있었다. 첫 눈에도 남자는 이곳 생활 전반에 농익어 보였다. 나 같은 애가 이미 열은 더 왔다 갔다는 듯, 수강신청으로 온 게 확실하다는 어조로 처음 본 나에게 말부터 놓았다. 짧은 말씨가 나쁘지 않았다. 나보다 나이 많아 보여서라기 보다, 선배니까 그럴 수 있다는 생각보다, 그냥 괜찮았다. "요"가 빠져 어딘가 섭섭할 법도 했지만, 당신이라면 허락 할 수 있는 말투였다. 내가 하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날 알았다. 닭 백숙처럼 뽀얀 얼굴, 검정 뿔테 안경, 말 끝마다 보이는 두 뺨 위 보조개, 그런 그가 귀여웠다. 적당히 안 잘생긴 얼굴, 경쟁이 덜 할 것 같은 외모, 그러나 충분히 매력있는, 남자는 호감이었다. 어쩐지 이 사람인 거 같다. 아무튼 대학교 오길 잘 한것 같다.


뿔백(*뿔테 낀 백숙)은 이어 말했다.


"여기 프린트물 읽어 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다시 오세요."


조교는 나 같은 열을 위해 자료를 준비해 둔듯 했다. 더는 할 말이 없어 "네." 한 마디 하고는 조용히 문을 닫아 나왔다. 이내 응큼한 마음이 떠올랐다.


'알아도 모르는 척할테다, 몰라도 모를 것이다, 더욱 모른다 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프린트물은 두 손으로 구겨 냅다 휴지통에 버렸다. 읽어 볼 필요도 없이 내일 조교 사무실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뿔테 낀 백숙을 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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