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알기로는 서울에서 고전음악 음반을 직접 보고 골라서 살만한 곳은 신사동에 있는 풍월당이 거의 유일하다. 대형서점에 입점한 체인점들이 없지 않으나, 다양한 취향의 고객들을 상대해야 하니 가요, 팝, 재즈, 뉴에이지, 국악, 고전음악 등 장르별 재고는 매우 제한적이고, 그러니 이미 많이 팔리는 대중적인 음반들 만을 찾을 수 있다. 고르고 발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곳들이고 그래서 풍월당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풍스러운 이름만큼이나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을 가지고 있는데, 5층 건물의 4층에 음반매장이 자리하고 있고 5층에는 작은 강의실이 있어 주 단위로 고전음악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독립 음반가게들이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이익이 남기 어려운 고전음악 음반만 파는 곳이 압구정 로데오 한복판에서 어떻게 오래 유지하고 있는지 신기하다. 2003년에 시작하였다니 이제 15년이 넘었다. 한동안 연말에, "올해도 몇천만 원 적자입니다"라고 자랑하듯 날아오는 풍월당 이메일들을 기억한다. 이제는 흑자 전환을 했다는 소문도 들리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사실, 책과 마찬가지로,음반도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거의 항상 조금이라도 저렴하고 그 종류도 더 다양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는 이유는 음반을 고르는 그 잠시의 여유가 즐겁기 때문이다.
오래 다니다 보니 발견하게 된 또 다른 즐거움은 풍월당 추천 음반들이다. 색색의 메모지에 손으로 쓴 추천의 말을 CD 위에 붙여놓고 이들은 따로 탁자 위에 널어놓는데, 간혹 전에 모르던 연주자, 평소에 잘 안 듣는 작곡가, 혹은 재발매된 희귀음반을 찾아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개인적 취향들이 모두 다를 것을 감안하면 타율 100프로는 아니겠지만, 이미 소장하고 있던, 그래서 내 나름의 호불호가 이미 정해져 있던 음반들 중 여기 올라오는 녀석들을 보자면, 그리고 그동안 이렇게 구입한 수십 장의 CD들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마음에 드는 컬렉션이다.
갈 때마다 그중 한두 장은 거의 항상 가져오게 되는데, 이렇게 얻어걸린 음반 중 하나가 Koroliov의 Handel Keyboard Suite No.4,3,7,8을 담은 한 장 짜리이다. 풍월당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웬만한 아이돌 부럽지 않을 실장님이 '이 음반이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엄청 화가날 것 같다'라고 써 놓았었다. Hanssler라는 독일의 상당히 규모 있는 독립 음반사에서 출시한 이 앨범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나의 인생 음반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사실 18세기 음악들은 바흐를 제외하고는 거의 찾아 듣지 않는 편이었는데, 특히 헨델, 하이든과 대부분의 모차르트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베토벤의 강렬함, 슈베르트의 따스함, 브람스의 장중함, 드뷔시와 라벨의 산뜻함, 열정으로 가득한 19세기와 20세기 동유럽, 북유럽의 작곡자들, 이런 다양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정직한 소리라는 인상 때문이다.
특히 Orchestra를 사용하는 방식에 관한 한, 18세기는 19세기 이후와 비교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바흐의 콘체르토를 브람스 혹은 라흐마니노프의 그것들에 비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터인데, 그럼에도 바흐가 독보적인 이유는, 흔히 솔로 악기에서 찾을 수 있다. ‘Well-Tempered Clavier’을 비롯한 건반악기 작품집들, Solo Violin을 위한 Sonata & Partita, Cello Suites에서 이미 비교 불가능한 그를 볼 수 있다. 특히 Art of Fugue에 이르러서는 이게 과연 20세기가 아닌 18세기 음악인 것이 가능한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Koroliov가 연주한 헨델의 피아노 모음곡은 전혀 18세기스럽지 않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처럼 춤곡 모음의 자유로운 형식인데, 언뜻언뜻 베토벤/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들 그리고 특히 브람스의 말년에 작곡된 Intermezzi 들을 듣는 듯하다. 조금 더 듣다 보면 발견하는 것은, 일곱 번째 모음곡의 잘 알려진 la passacaglia을 비롯해 곳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멜로디들이다. 바흐의 경우에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아리아처럼 아름다운 테마에서 시작하더라도 변주와 푸가를 통해 형식의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다는 인상이 더 강하다. 헨델의 피아노 모음곡은 이에 비하면 훨씬 따뜻하고, 서정적인 소리를 들려준다.
이상한 것은 이 아름다운 모음곡의 음반들이, 국내에서는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Richter와 Gavrilov가 절반씩 나누어 연주한 1979년 실황 음반이 네 장의 CD로 있으나, 국내에서는 그중 후반부가 절판이고, 한 동안 구할 수 있었던 Ragna Schirmer의 16곡 전곡 녹음은 국내 음반 시장에서는 아예 사라진 모양이다. 그 이외에는, 베토벤 등의 음반에 남는 자리에 끼워진 한곡씩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미국의 대형 온라인 매장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은데, 특히 Koroliov나 Richter 정도의 명망을 가진 타 피아니스트의 녹음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Richter, Gavrilov, Schirmer, 그리고 Koroliov의 연주를 비교해보면, Koroliov의 연주는 Richter를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Richter에 비하여 조금 더 부드럽고, 더 서정적이고, 간혹 처연하기까지 하지만 기본적인 접근 방식은 동일하다. 이에 비하여 Schirmer의 경우 전혀 다른 소리를 들려주는데, 조금 더 "바로크"스럽다고 할까? 동일한 스코어에서 이토록 다른 느낌의 소리가 날 수 있다니.... 연주자의 몫이 얼마나 클 수 있는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많지 않은 헨델 음반들을 수집하기 시작하면서, 조금 더 널리 알려진 수상 뮤직과메시아라는 "대표곡"들에 가려진 헨델의 진면목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수많은 오라토리오와 오페라에 숨겨진 아리아들은 빛나는 보석들과 같다. Lascia ch'io pianga로 대표되는 그의 아리아들은 19세기의 베르디나 푸치니의 아리아 못지않게 고혹적이다. 역시 풍월당 덕분에 알게 된, 소프라노 Renee Fleming이 녹음한 헨델 아리아 모음을 듣다 보면, 다시 한번 이 음악들이 과연 바로크 시대의 것이 맞나 하고 의심을 하게 될 정도로 현대적이다.
한동안 바흐 덕후로서 키보드 곡들, 특히 평균율과 Art of Fugue의 모든 음반을 쓸어 모으던 시절이 있었는데, 헨델 덕후로서는 이보다는 보물 찾기에 능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풍월당에 더 자주 다녀야 할 새로운 핑계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