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잘 드는 주말 오후. 고구마 먹기 좋은 계절이 왔다. 행복하다.
지난달 음성에 가서 꿀고구마를 수확했다. 별 생각 없이 찜기에 쪄먹었는데(그래도 맛있었다), 나중에야 에어프라이어에 돌리면 2배는 맛있어진다는 걸 알았다. 깨끗하게 씻어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180도에서 20분, 뒤집어 20분 돌리면 진짜 맛있는 군고구마가 된다. 오래 돌릴 수록 진한 단맛과 쫀득한 식감이 나지만 안 그래도 된다. 전기료도 아깝고 적당히 고슬한 것이 맛있다.
에어프라이어는 아무래도 고구마를 위해 발명된 기계같다.
고구마가 남았는데 지난주일 교회에서 어려운 지역교회 돕는다고 고구마를 판다기에 또 한 박스 사왔다. 오늘 개봉해서 구웠는데, 내 입엔 분명 음성 고구마와 다르다. 아내는 두 개나 먹었으면서도 이건 꿀고구마야 우긴다. 응? 호박고구만데. 호박고구마야. 그러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조용히 방에 들어와 검색을 해본다.
-호박고구마 : 물고구마와 호박의 교배종. 단맛이 강하고 호박처럼 노란 속을 가지고 있다. 익히지 않았을 때는 주황색을, 푹 익힌 뒤에는 짙은 노란색을 띤다. 외관이 대부분 방추형이다.
-꿀고구마 : 일본에서 건너온 '하루까' 고구마를 한국에 맞게 키워낸 품종이며 꿀맛이 난다. 요즘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고구마. 밤고구마와 호박고구마가 적절히 섞여 있는 품종. 갓 수확했을 때는 밤고구마와 같은 퍽퍽한 식감이지만 후숙 과정을 통해 호박고구마처럼 촉촉하고 달콤하게 변한다. 노랗지만 호박고구마처럼 샛노랗지 않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만 굳이 확인은 안 해야지. 꿀이든 호박이든 맛있으면 됐지.
아내가 이 글을 안 봤으면 좋겠다.
아주 어릴 때 겨울이면 작은방 윗목에 있던 고구마 퉁가리가 지금도 기억난다. 고구마는 얼면 못쓰기에 꼭 방에 보관하곤 했다. 소중한 고구마들 때문에 방이 더 좁아졌다. 그땐 물고구마가 전부였고, 나중에야 밤고구마가 나와 가을소풍 때 먹었다. 세밑엔 가마솥 장작불에 고구마 엿을 고았고, 눈이 많이 오면 고구마 두어 개 눈 속에 던져 두었다 한밤중에 일어나 깎아먹기도 했다. 살짝 얼면 더 맛있다는데 난 그맛을 잘 몰랐다.
감자는 좋은데 고구마는 싫었다. 물컹하고 들큰한 단맛이 영 별로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툭하면 밥에 고구마를 썰어 넣어 날 실망시켰고, 아버지가 싫어하던 갱시기에도 굳이 고구마를 넣으셨다. 아버지는 갱시기는 싫은데 갱시기 속 고구마는 좋다 하셨다. 뭔 조환지 사뭇 이상했다.
농사 짓는 박형진 시인이 쓴 고구마에 대한 에세이가 있다. 가을은 고구마 찌는 냄새로 시작한다고. 퉁가리에 고구마만 있어도 부자가 된 듯한 시절, 고구마만 있어도 좋았던 추석이 있었다고 썼다. 그의 글을 좋아하기에 그 부분 옮겨 본다.
나의 추석과 가을은 어릴 적의 고구마 찌던 냄새로부터 시작된다. 긴 간짓대 하나를 마루에 걸쳐 놓고 앉아 보리멍석에 닭 쫓는 일과 보리 퍼다 주고 참외막에 개구리 참외 먹는 때가 지나면 여름내 가서 놀던 당산나무의 팽이 누우렇게 읽어가고 고구마 두둑엔 고구마가 크느라 금이 쩍쩍 간다. 가을이 온 것이다. 그런 곳을 파 보면 영락없이 주먹만씩한 고구마가 들어 있게 마련인데 먹을 만하게 고구마 밑이 잡혔다 싶으면 처음엔 순은 놔둔 채 큰 걸로 한두 개 정도씩만 파내고 두둑은 다시 잘 아무려 놓는다. 여기저기 금간 곳을 더듬어서 한 다라이 정도를 캐면 밭고랑의 강냉이도 좀 따다가 고구마와 함께 찐다. 이 무렵은 보통 산의 풋나무를 해다가 때는 때이다. 잘 영근 풋나무 이파리가 타닥거리며 타는 냄새도 좋은데 집집마다 풍겨나와서 고샅을 진동하는 점심 무렵의 고구마 찌는 냄새가 어울리면 무엇이라 표현할 도리가 없다.
나이 들어 그런가 고구마가 너무 좋다. 에어프라이기에서 고구마 익어가는 냄새에 세상이 다 평화로워진다. 주말 오후, 접시에 사과 한 알 뜨거운 고구마 두 개면 뭐 하나 부족한 게 없다. 지금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