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말해왔듯 순례길은 친구를 만들기 좋은 곳이다. 그런데 과연 친구만일까? 전쟁통에도 피어나는 사랑인데 이까짓 순례길의 고통이야 한낱 감기만도 못할 것! 오히려 적당한 고통과 시련은 사랑을 피우는데 촉진제 역할을 하니. 맥주보다 짜릿하고, 우정보다 자극적인 사랑이 곳곳에서 싹트는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지금까지 순례길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이미 “길에서 눈 좀 맞겠는데?” 싶었을 거다. 만약 이런 생각을 못 했다면 연애세포 생사 확인이 시급하다. 당시 내 연애 세포 역시 죽고 성불까지 마친 상태였기에 남들의 짝짝꿍을 지켜봐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무리가 생기고, 어느샌가 그중 유독 자주 붙어있는 한 쌍이 생겨난다. 우연이든 의도적 접근이든,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남들도 느낄만한 핑크빛 기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자고로 사랑은 세상만사 모든 능력치에 버프를 거는 궁극의 기술! 사랑의 버프에 걸려 핑크빛 기류에 휩싸인 이들의 발걸음은 다른 이들보다 가볍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밀밭도 새로워 보이며, 저녁의 술 한잔은 세상 그 무엇보다 달콤할 것이다(나는 잘 모르겠다만). 이들의 표정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몸을 뚫고 나오는 행복을 억누르지 못해 조급한 미소를 연신 띠고 있는 천진난만한 얼굴.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살짝쿵 묻어나는 핑크빛 기류에 나까지 웃음이 지어지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이 기적 같은 일이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건 아님을. 누군가 핑크빛 기류에 휩싸일 때, 누구는 잿빛 구름에서 떨어지는 비를 맞는다. 사람의 마음은 엇갈리기도, 일방적이기도, 때론 중간에 끊어지기도 하며 ‘기적’이란 정체성을 지키고자 확률을 떨어트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기적의 대면을 앞두고 목전에서 실패한 이들을 감싸는 건 바로 나와 같은 보통의(?) 순례자 들이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에워싸 서둘러 잿빛 구름을 걷어내고 회복의 물약(술)을 건넨다.
길의 후반부에 우리 일행에 합류했던 ‘훈’동생. 훈이는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가기 위해 입국한 프랑스 파리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동생이었다. 본인도 프랑스 여행을 마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거라 했던 훈이. 일정 차이가 있어서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는데 중간 지점을 버스로 건너뛴 훈이를 이렇게 길에서 만나게 되었다. 파리에서 겨우 반나절 정도 함께했던 사이였지만 마치 오래된 형제처럼 만남을 기뻐했고, 당시 혼자였던 훈이는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그렇게 함께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훈이가 길 초반부에 함께했던 일행 중 한 여자와 재회했다. 여자는 다리가 아파서 뒤처졌다가 회복하고 속도를 내서 걷고 있었다. 훈은 나와의 만남과는 또 다른 텐션으로 여자와의 재회를 기뻐했다. 이후로 훈이는 여자 옆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걸었고, 우리도 그런 훈이를 응원하며 방해하지 않고자 눈치껏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어주었다. 그렇게 훈이가 새싹과 같은 핑크빛 기류를 조금씩 키워가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한눈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자세로 길가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 공교롭게도 우리 일행의 사람들과 훈이, 그리고 그 여자의 간격이 크지 않았을 때, 모두가 한 풍경을 공유하는 공간에서 그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훈이 옆에 있는 여자에게 다가왔고, 여자 역시 남자에게 다가갔다. 둘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다가갔고 그 여자의 표정은 본인과 재회했던 훈이와 똑 닮아 있었다. 둘은 마주했고 누구나 감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핑크빛 오라를 뿜어냈다. 여자는 마치 훈이가 갑자기 증발한 듯 자연스레 남자와 걷기 시작했고, 훈이도 자연스레 걸음을 늦춰 둘과의 간격을 벌렸다. 인사는 없었다. 그들을 뒤따라가던 우리 일행은 재빨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자제하기로 했다. 훈이는 자연스레 뒤에 있던 우리와 합류했고 그날 저녁 우리는 씁쓸한 술을 나눴다.
이처럼 사랑과 실연이 곳곳에서 피고 지는 산티아고 순례길. 액션, 모험, 다큐 물인 줄 알았으나 로맨스까지 품고 있는 이 길의 매력. 다들 사랑 찾아 한 번 걸어 보는 건 어떠한가? 하지만 어느 정도 쓴맛은 각오하는 게 좋을지도.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