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쫓은 건 풍선이었지만, 잡은 건 꿈이었다
“풍선, 풍선.”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다. 50분 페이스메이커를 발견한 순간 모든 생각이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박자 계획도 익숙해졌겠다, 첫 1km도 마음대로 달렸겠다, INTP에게 계획은 마음대로 바꾸라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 풍선을 쫓자. 따라잡을 수 있다면 따라잡고, 마지막에 제칠 수 있다면 제치자. 결정했으면 이행해야 한다.
달려.
2km, 9분 52초.
페이스메이커는 네거티브 스플릿을 계획한 듯했다. 나처럼 따라잡으려는 사람이 많아지자 페이스를 늦춰 달려주었다. 풍선이 점차 가까워졌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페이스메이커의 바로 뒤 대각선 오른쪽에서 내달리고 있었다. 힘이 닿는 한 달렸다. 풍선 글씨가 조금 더 잘 보이는 색깔로 적혔다면 좋았겠다 생각하며. 글씨가 밝은 노랑이나 아예 흰색이었다면 더 잘 보였을 터였다. 하지만 일단 풍선이 있다는 게 어딘가? 달려, 달려!
이 즈음 공연히 웃음이 났다. 평소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리면서도 몹시 즐거웠다. 평소에 절대 달릴 수 없었던 차도를 누빌 수 있었기 때문일까? 타임 어택을 수행하면서도 마냥 신이 났다. 로티인지 로리인지 롯데월드의 마스코트 너구리도 보고, 롯데월드타워의 크기 변화 체험도 하고, 잠실역과 석촌역, 8호선 지하철 두 정거장을 달렸다는 점도 좋았다. 그래서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갑자기 오른발에 쥐가 날 조짐을 느꼈다. 검지와 중지 발가락에 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첫 대회, 도봉마라톤 5km에서는 그대로 쥐로 이어졌던 감각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차분해졌다. 그땐 쥐가 나도 달렸는데 고작 단순한 징조 따위에 흔들릴 필요 없었다. 기가 막힌 때에 풍선이 저만치 멀어져 갔다. 역시 이 분께서는 네거티브 스플릿이었구나-생각하며 풍선을 보냈다. 풍선은 다소 아쉽지만 아직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지하차도를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하차도로 이어지는 내리막을 달리면서 나타난 왼쪽 종아리 통증은 다소 신경 쓰였다. 올라갈 때 걸으면서 주무를지 고민했다. 하지만 오르막을 달리면 자연히 언덕주 연습을 할 수 있겠단 생각에 더 결연하게 달렸다. 무슨 대회에서 언덕주 연습이냐 물으면 할 말이 없지만서도.
지하차도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 “파이팅!” 나도 외쳤다. “파이팅!”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응원의 메아리, 처음에는 크루원끼리 서로를 발견하고 외치는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돌림 노래가 들리니 달리는 모두가 서로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들 힘들지만 힘내고 있었다.
그래, 모두 착각이야. 스스로에게 속으로 말했다. 오른발에 쥐가 나는 느낌도, 왼 종아리를 타고 흐르는 통증도 모두 착각이야.
이 통증 때문에 멈춘다면 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니?
설령 네가 두 번 다시 달리지 못할지라도,
이 대회를 떠올리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니?
……아니.
동시에 RCNB 크루원들이, 특히 풀 코스를 달리는 크루원들이 생각났다. 그분들의 열정과 노고에 비하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모두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며 달리니 몸도 마음도 괜찮아졌다. 통증을 안고서도 계속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하니 더욱 괜찮아졌다. 역시 미지의 공포가 가장 무서운 법이다.
반환점에서는 동마크루로 자원봉사하는 RCNB 크루원들이 생각났다. 급수도 걷지 않고 천천히 달리면서 했다. 동시에 10km 달리기 조언 영상에서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진짜 레이스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제, 온 만큼만 다시 가면 된다.
지하차도에서 다시 올라오니 평균 페이스가 5분 41초까지 떨어져 있었다. 경악하며 질주하니 금세 5분 극초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풍선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이제 과거의 자신을 이기는 쪽으로 전환하고 달리면서 노래를 바꿨다. 미가 이끄는 대로 달리다 지난번 고구려마라톤에서 보았던 ‘헐레벌떡’ 크루를 보고 내심 반가웠다. 다시 나타난 롯데월드타워도 반가웠다. 더 열심히 달려서 더 가까워져야지.
7km 경과, 평균 페이스 5분 3초. 이제 약 15분만 더 달리면 된다. 열심히 달리다 ‘걸어가면 욕해주세요.’라고 적힌 하늘색 민소매를 입은 분을 보았다. 내 마음과 같았다. 욕을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분과 나는 그 순간을 달렸다 감히 생각한다.
그때 갑자기 검은 풍선이 나타났다. 동시에 깨달았다. 50분 페이스메이커는 한 명이 아니란 사실을! 평균 페이스상 저분은 분명 50분 페메실 거야! 힘이 솟았다. 다시 풍선 추격전을 펼쳤다. 풍선을 따라갈 생각 하니 즐거웠고 즐거우니 더 힘이 났다.
중간에 살짝 힘이 빠져서, 끝나고 맥주 마실 거라고, 빨리 달려야 더 빨리 마실 수 있다고 스스로 타일렀다. 끝이 가까워질수록 더 힘내서 달리자 생각했다.
9km 경과. 평균 페이스는 여전히 기가 막히게도 5분 3초였다. 8.2km 지점에서 또 다른 50분 페이스메이커가 나타나서 50분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나 같은 사람들의 마음이 든든해졌다. 남은 거리가 m 단위로 줄어들자 사람들이 숨겨진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다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오른쪽으로 꺾었다. 나도 꺾었다.
결승선이 보였다. 갑자기 누가 양손을 번쩍 들고 멋지게 결승선을 넘었다던 블로그 후기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나도다! \^0^/ 잠깐 손 번쩍 들고, 사진 찍힌 점 확인하고, 전력질주 해서-
완주!
결승선 사진을 혼자서는 못 찍을 듯해, 나처럼 혼자 오신 분께 서로 사진 촬영을 제안해서 찍은 후에 크루 단톡방을 보았다. 크루와에서 크루원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제야 날아간 회사 모니터 반쪽처럼 나의 정신도 날아가 크루와에 내 정보를 입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분들 기록이라도 볼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때마침 같은 크루원이 완주했다는 톡을 보았다. 추워서 곱은 손으로 오타를 무한발산한 끝에 겨우 만나 뵀다. 보자마자 반가워 덥석 껴안았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분께선 감사하게도 기록 보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처음에 손이 굳은 탓에 내 배번을 잘못 입력해서 기록이 없는 줄 알고 순간 당황하다 다시 제대로 입력했다.
?……!
49분 57초.
기록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사과도 잊고 떨리는 손으로 기록을 보여드렸는데 진심으로 축하해 주셔서 감사드릴 따름이었다. 다른 크루원들께서도 축하해 주셔서, 정말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했다.
단 3초 차이라 해도 50분 안에 들어왔다……내가.
인지하자마자 생각했다. 이제 누군가 달리자고 부를 때 자신감을 갖고 나갈 수 있겠다, 언제 어떤 훈련을 하더라도 할 수 있겠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고. 크루 정기 모임에도 잘 나갈 수 있고, 늦봄의 하프 마라톤도, 가을의 풀 마라톤도 내가 마음만 먹는 한, 도전하는 한 해낼 수 있겠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처럼 갠 날씨, 푸른 하늘 위 둥실 떠오른 포카리스웨트 캔 풍선이 더 예뻐 보였다.
본격적으로 달린 지 330일,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날 후기를 쓰며 호기롭게도 앞으로는 더 멀리 달리는 힘을 길러서, 풀에서는 꼭 5시간 안에, 나아가 4시간 반 안에 완주하고 싶다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그 꿈은 이루어지긴 했다. 내가 바라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그건, 아주 조금 더 나중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