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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May 03. 2024

믿기 어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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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평론가


나의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4년을 살고 내가 2년째 살고 있는 6층짜리 빌라 클래식 하우스 2층에 햄스터 한 마리와 개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사 올 때 도배, 바닥만 하고 인테리어는 하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 엄마가 살고 있어서 도배와 바닥을 시공하는 동안 엄마께서 햄스터와 개를 돌보았습니다. 쥐는 무서워하고 개는 사람들이 너무 떠받든다고 싫어하는 말띠 여성인 엄마께 막상 같이 살다 보면 개도 햄스터도 사람도 종과 상관없이 가족이 된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부르르 떨며 '그렇게 하라고 해. 나는 싫어.'라고 딱 잘라 말하는 차가운 평론가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왔던 이삿날에 어느 때보다 독한 말로 비평하기를, 이 기지배 날짜를 정해도 이런 날을 정했다. 이놈의 새끼들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비도 오는데 하루죙일 낑낑거린다며 작은 엉덩이를 한 대씩 맞았습니다. 어떤 일이든 끝납니다 어머니. 드디어 클래식 하우스 2층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엄마께로부터 독립했습니다.


독립해서 신나는 일은 내 새끼들이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일입니다. 슬픈 일은 엄마께서 나 몰래 찔끔거리는 일을 숨겨봐도 내가 다 알게 되는 일입니다. 이사 들어온 첫날, 4층 언니가 내려와 자기도 코카 한 마리를 키운다며 이 빌라에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 이사를 와서 너무 좋다며 집 안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샅샅이 훑어 보았습니다. 4층 언니가 가끔 전 부치거나 장 본 것을 나눠줍니다. 그 쯤 했으면 내가 답례라도 하고 친해져야 하는데 나는 처음 이사 온 날과 다름없이 깍듯합니다. 301호에는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부부가 사는데 나와 주차 문제로 얼굴을 붉혔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웃들과 1층 사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나의 옆집 202호 할머니, 할아버지를 제외 한 나머지 층에는 마주칠 일이 별로 없기도 하고, 이사를 오고 가는 일이 종종 있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자라 담배 못 피우는 세상은 아니지만 어쩐지 민망해서 우리 빌라에서 떨어져서 다른 집 담장에 가서 피우고는 하는데 옆 집 202호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인사할 일이 있어서 떡을 한 번 사다 드린 일도 있는데 나를 전혀 못 알아보셨습니다. 내가 먼저 옆 집 사람이라고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피우던 나를 향해 나도 집에서 피우는데 왜 여기까지 와서 피우냐고 하면서 지나가셨습니다. 일요일에 피오나를 산책시키러 일찌감치 집을 나설 때 202호 할머니는 성당을 가시기 때문에 몇 번이고 마주칩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비해 젊어 보이기도 하고 뼈가 하나도 휜 곳이 없이 꼿꼿해서 건강해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딘가 모르게 작고, 휘고, 연약해 보이는 80을 훌쩍 넘긴 노인의 인상입니다. 까맣게 물들인 염색이 효과가 없습니다. 가끔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올 때도 그건 할머니의 목소리입니다. 할머니는 피오나가 어떻게 그렇게 조용하냐고 신기하다고 하십니다.


처음부터 중고 냉장고였던 것을 음식을 너무 가득 채웠는지 고장이 났습니다. 동네에 방송을 하며 돌아다니는 아저씨께 냉장고를 팔고 싶어서 물었더니 3만 원에 가져간다길래 합의를 보았습니다. 아저씨가 바닥에 이불 같은 것을 깔고 혼자서 일을 하는데 날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나도 깜짝 놀라던 중에 6층 총무 아주머니가 후다닥 내려와서 나무랐습니다. 겁이 많은 나와 피오나는 어쩔 줄 몰라했는데 옆 집 할아버지가 문을 빼꼼 열고 2층이라 금방 끝날 텐데 별 일도 아닌 것 같고 그런다며 내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더워지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푸릇하게 색을 바꾼 나무들을 보고 놀라 등산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산에 사람이 많습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7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새로 산 릿지화를 시험해 보기 위해 암벽이 많은 방향으로 길을 선택했습니다. 기대한 만큼 돌에 쩍쩍 붙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암벽 구간에서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이 조언을 하셨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산길에, 아직 남아있는 겨울색과 초록이 섞인 숲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집 앞에 주차를 하고 내리려는데 허벅지가 뻐근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 보니 202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보였습니다. 두 분 모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할머니께 인사를 한 후 할아버지께 얼굴을 돌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내가 몇 번 보았던, 키가 작고 머리를 까맣게 염색한 분이 아니라 훨씬 키가 크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샌 분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니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였습니다. 할머니가 타박을 주며 말했습니다. '이사 온 지 몇 년 째인데 얼굴을 못 알아봐.' 할아버지는 칼칼한 음성으로 대충 둘러댔습니다.


이후에 자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그 집에 문이 열릴 때 보면 어느 때는 작은 할아버지, 어느 때는 큰 할아버지와 마주쳤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일을 엄마한테 말했더니 무표정하게 피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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