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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Dec 16. 2023

너답다는 우연

우연히 영인이를 만났다. 어- 나의 얼굴을 발견한 영인이의 입술과 눈이 마주쳤다. 영인이는 지하철에 들어오려던 참이고 나는 나가려던 참이었다.


영인이는 할 일없이 교보문고에, 회사를 조퇴한 나는 집에 가던 길이었다. 서로 가던 길을 미루고 지하철 밖으로 나와 육교를 건너 비탈길을 올라 2층짜리 카페 PAM의 문 앞에 들어섰다. 들고 있던 우산의 물기를 털었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 구석자리에 앉았다. 잘 지냈어? 4살 차이가 나는 영인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잘 지내는 거죠. 맞죠. 그렇죠. 영인이 풍의 대답이었다.


영인이의 도톰한 입술은 즐거울 때도 심각할 때도 눈길이 간다. 가지런하지 않은 치열을 숨긴 입술은 도톰하기도 했고 뾰족하게도 생겼다. 먹을 때 입 꼬리가 입술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뾰족한 입술산이 앞을 향해 우물거리던 모습을 좋아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내가 실수한 거 맞지? 현희언니가 너한테 잘못한 거 맞는데, 미안. 나도 개념 없었어, 미안. 최대한의 미안함을 동원해서 영인이에게 사과했다. 현희언니의 남자 친구는 만난 지 한 달 된 언니보다 다섯 살 어린 연하였다.


3년 전, 현희언니는 회장님 비서로, 나와 영인이는 코스메슈티컬 부서 연구원으로 소성바이오에 근무했다. 현희언니가 소개팅앱으로 만난 헬스트레이너 박 씨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그 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언니의 생일, 8시가 넘어 연락이 와 나간 술자리에 언니와 박 씨가 붉게 물든 얼굴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인이도 곧 합류했다. 현희언니는 나와 영인이 외에 친구들과 지인들을 한 두 명씩 계속 불러들였다. 11시쯤 되니 자리를 옮기고 테이블을 붙여 늘어난 자리가 번화했다. 서로를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취해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박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인 씨, 눈 하고 코 진짜 작다. 입술도 한번 보자. 영인이에게 다가가려는 박 씨의 팔을 잡고 현희언니가 맞장구를 쳤다. 그치, 자기야. 영인이 그것 때문에 쌍꺼풀 수술할지도 몰라. 영인아 병원 알아봤어? 코도 같이 할 거야? 영인이보다 11살이 많은 현희언니는 막냇동생을 대하듯 영인이 흉을 보았다. 박 씨가 어색하게 웃었고 영인이의 아름다운 입술은 벌어져 못난 치열이 드러났다. 언니, 제가 뭘 하든 그 얘기를 여기서 꺼내는 건 불편한 거 같아요. 기분 나빠요. 술이 깬 얼굴이 된 현희언니를 보고 내가 나섰다. 영인아, 언니한테 말투가 그게 뭐야? 어색해질 상황을 미리 수습하고 싶은 마음에 애꿎은 영인이를 나무랐다.


영인이는 계약기간이 끝나 그랬는지, 그날 일 때문이었는지 회사를 그만두었다. sns에 가끔 올라오는 사진 속에 영인이의 얼굴은 없었다. 영인이가 올리는 것은 세탁기가 돌아가는 사진,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사진이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는 것들이었다. 영인이다웠다.


언니가 잘못한 건 없죠. 영인이가 말했다. 영인이가 내게 심한 말을 할리 없다. 나는 현희언니와 그때 사귀던 박 씨의 짧은 만남과 이별, 회사 사람들, 화장품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먼 나라 이야기를 했다. 영인이는 내가 하는 이야기 중에 몇 가지 일에,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면 전에도 영인이가 자기 생각을 길게 말했던 기억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걸까.)


혼자 떠들다 잠잠해진 내가, 혹은 침묵이 어색했던지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희언니와 사귀던 박 씨가 '그날' 이후로 처음엔 드문드문, 나중엔 매일, 아침저녁으로 연락을 했다고 한다. 내 입장에서 더욱 놀라운 이야기는 박 씨보다, 같은 연구실에 있던 영인이보다 세 살 어린 신입 연구원 문상욱과의 일이었다. 문상욱은 키가 크고 눈이 컸다. 회식자리에서 밝힌 꽤나 긴 그의 장기연애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문상욱과 영인이의 흔한 양다리 연애 이야기에 놀라움을 감추려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알지 못한 영인이는 장기연애 중이던 문상욱과 삼각관계로 시작해서 떳떳한 연인이 되었다가 다투고 화해하고, 한 번씩 이별 통보를 하고, 합의 이별로 마무리 지었다는 꽤나 복잡한 연애 스토리를 영인이 답게 덤덤히 들려주었다.

 

영인이와의 40분이 지나갔다.

3년 전 영인이와 일할 때 거의 매일을 같이 먹고 같이 오갔던 1년 2개월이 지나갔을 때처럼.

안녕히 가세요. 영인이의 인사였다. 영인이는 지하철 아래로, 나는 육교를 올랐다.


부엌 창가에서 보이는 육교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치고 있다. 시끄러운 빗소리에 뒤늦게 받은 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늦게 받았어? 몸은 좀 괜찮아? 그가 물었다. 응, 집에 와서 누웠더니 괜찮은 거 같아. 내가 대답했다. 미안해. 그가 말했다. 어제, 그와 나는 평소처럼 결혼과 연애 문제로 장문의 카톡을 주고받으며 심각하게 다투었다. 7살 차이가 나는 문상욱과 나의 사이를, 그의 엄마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갈 때 사갈게.


문상욱의 반바지가 보였다. 날씨와 상관없이 반팔과 반바지 차림에도 후끈한 열을 뿜는 문상욱의 체질을 떠올렸다. 노트북 앞에 앉아 영인이의 sns에 들어가 보았다. 창을 닫지 않고 새로운 창을 열어 유튜브에 들어가 저장해 둔 리스트를 열었다. 재즈 스타일로 연주하는 피아노 모음집을 선택했다. 새로운 창을 열었다. 북마크에 저장해 둔 쇼핑몰을 클릭하고 문상욱에게 전달될 크리스마스 선물을 훑어보았다. 닫지 않은 영인이의 sns로 다시 돌아갔다. 서가에 빼곡하게 꽂힌 분홍색 책들이 가득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영인이답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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