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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Apr 14. 2024

복수불반분

개가 정한 자리는 하필 내가 사는 5층 빌라 앞 화단이었다. 몸이 날씬하고 새의 깃털같이 단단해 보이는 털을 가진 개였다. 이제 막 노란 꽃이 보이려고 하는 화단이다. 긴장한 개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낑낑거렸다. 곧이어 두 줄로 동그랗게 말린 갈색깔의 그것이 화단에 드러났다. 한 손에 전자담대를 입에 갖다 대고 있던 주인이 검정 봉지를 펼치느라 부스럭거렸다. 검은색 뿔테 안경이 넓적한 얼굴을 꽉 잡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제가 여기 빌라 살거든요.

여기는 꽃밭이고요. 거름이라도 주시는 건가요?


호소력 짙은 두 줄의 문장은 개주인을 당황하게 했다. 어쩌면 내가 그보다 덩치가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망설임 없이 반성했다. 나에게 자신이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하고 꽃밭을 치우고 개를 재촉하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도 타인의 무언가를 망쳐버린 듯한 기분에 뒤끝이 깨끗하지 않은 기분이었다. 금요일에 겪은 일이다.


일요일 아침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기 위해 7시 45분에 짐을 꾸려 집을 나섰다. 빌라 입구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아침 바람이 차가웠다. 주차장 쪽으로 가기 위해 몇 걸음을 옮기자 화단에 낯익은 모양의 동물똥이 꽃 위에 앉아 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그것의 형태와 질감, 크기가 거의 일치했지만 섣불리 판단하기는 싫었다. 집에 다시 올라가 장비를 갖추고 내려와 말끔히 치웠다. 차를 타고 15분을 달려 계산중학교에 도착해 주차를 했다. 강당 안으로 들어가자 회원들이 보였다. 아는 얼굴끼리 인사를 하고 총무가 와서 출석을 부르면 회원들이 주변으로 모였다. 스물여섯 인 김정민이 몇 주 동안 나의 파트너가 되었다. 김정민과 눈인사를 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김정민은 검은 안경테 뒤로 얄팍하게 째진 눈으로 자기 라켓의 스트링을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셔틀콕을 만지작거렸다. 김정민의 라켓은 선수들이 선호하는 가는 스트링을 달고 있었다. 김정민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다. 김정민에게는 눈에 띄는 버릇이 있다. 시합이 시작되면 김정민과 나는 말없이 각자의 헛스윙을, 서브 실패를, 어색한 스텝을 밟는다. 김정민은 그럴 때마다 한숨을 내뱉었다. 김정민의 한숨은 그것만의 독특한 특색을 갖추었는데, 듣고 있는 사람에게까지 죄책감을 일으키는 후회와 멸망의 한숨이었다. 시합이 후반부에 들어서고 참패의 기운이 우리를 감쌀 때 김정민의 한숨 소리의 깊이는 짙어졌다. 노인의 폐에서 들릴 듯 한, 맥베스의 결말 같기도 한, 엎질러진 물이 내는 소리 같았다. 그러한 울림은 나의 의식에 너무 자주, 불쑥 나타나고는 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두 줄로 말린 그것이 정확히 같은 자리에서 발견되었고 토요일까지 이어졌다. 그 주 일요일은 배드민턴을 포기하고 주차장 근처에서 새벽 6시부터 잠복을 섰다. 눈에 띄게 큰 몸집을 감추느라 그림자 하나까지 신경 써야 했다. 토요일 밤까지 아무 흔적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아침 산책길에 일을 보고 가는 거라 예상했다. 어스름이 걷히고 7시 가까이 되었을 때 멀리서 작은 개 한 마리와 목줄을 잡고 있는 여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화단 앞으로 다가왔을 때 숨소리를 막고 지켜보았다. 스폿을 정한 개는 한참을 코를 땅에 박고 냄새를 맡았다. 스폿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뒷다리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낮추었지만 낑낑대는 소리를 여러 번 낼뿐 아무 소득이 없었다. 스폿을 잠깐 응시하고 실패의 냄새를 맡고는 주인을 끌고 자리를 떠났다. 한 주 내내 기다려왔던 이벤트에 빈 손이 되어버린 손바닥을 주머니에 넣고 개가 오래도록 바라본 스폿 앞에 멍하니 서있었다. 다음 날 출근길에 일찍 나와 서성거려 보았다. 아무것도, 아무 흔적도 없었다. 개의 배변에 문제가 생겼는지, 애초에 나의 기대가 낳은 결과인지 모를 일이었다. 한 주가 지나도록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거슬렸지만 배드민턴 동호회에 가야 했다. 파트너가 바뀌는 날이다. 총무가 출석을 부르고 새롭게 정해진 파트너를 호명했다. 나의 새로운 파트너인 50대 후반의 문선숙 님은 10년 구력을 가진 베테랑이자 눈, 코, 입이 증명하는 명백한 미인이었다.


해연 씨, 내가 먼저 들어갈게요. 해연 씨가 뒤에 들어와 주세요. 내가 사이드로 최대한 꽂으면 해연 씨는 준비하고 계시다가 받아주세요. 해연 씨는 길게, 클리어에만 집중해 주세요. 해연 씨 파이팅!


1세트가 끝나고 자리를 바꿀 때 내 가방이 놓인 벽 쪽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김정민을 보았다. 숨이 넘어갈 듯 벽에 기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내 가방 위에 땀방울을 흘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배드민턴 유튜브 방송을 한 지 6개월 된, 3만 구독자의 유튜버이자 전직 배드민턴 선수인, 20대 초, 중반으로 보이는, 동안얼굴을 가진, 37세 경호수가 김정민의 파트너였다. 경호수가 김정민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3세트 후에 선숙 님과 나는 정해진대로 구호를 외치고 한쪽 벽면에 모아둔 가방 쪽으로 향했다. 나의 가방 안에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던 라켓이 보이지 않았다. 여분의 셔틀콕은 그대로인데 주변을 뒤져보아도 라켓은 보이지 않았다. 선숙 님이 나서서 함께 찾아보았지만 라켓은 찾아지지 않았다. 총무에게 사정을 얘기해 두는 것으로 수습되었다. 주차장으로 갔을 때 뒷좌석에서 가방을 뒤적거리는 김정민을 보았다. 가방에 라켓 3개를 정리하는 김정민을 지나쳐 오른쪽으로 꺾어져 운전석에 앉았다.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문 닫는 소리가 크게 났다. 김정민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렸다. 김정민이 먼저 갈 때까지 기다리다 1분 정도 후에 출발했다. 김정민을 따라갈 결심을 언제, 왜 했는지 기억나지 않다가 김정민이 자기 아파트에 주차를 하려고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갈 때 갑자기 의식에 불이 켜졌다.


'여기까지 왜 따라온 거야.'


지하주차장으로 따라 들어가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김정민이 짐을 챙기는 모습을 발견하고 안전하게 차를 숨기고 김정민을 쫓아갔다.


501호와 502호 사이에 서서 두 개의 문고리를 바라보았다. 502호 현관에서 덜거덕 거리는 소리가 들려 튀어나온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김정민이 cock이라고 부르는 개 한 마리와 함께 산책을 나서려는 차림으로 집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다. 내가 앞서 도착하고 김정민과 콕이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모습을 보여 뒤를 따랐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긴 대로변을 30분쯤 걷다 하천이 보이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하천길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콕의 속도에 숨이 찬 김정민은 목줄을 쥐어 콕의 속도를 조절했고 나도 숨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뒤쫓았다. 꽃구경을 나온 사람들에게 밀려, 가다 서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되돌아오는 길은 계단을 올라 대로변을 건너 인가로 향했다. 카페가 가끔 보였고 빌라들이 늘어섰다. 빌라 사이, 곳곳의 냄새를 맡던 콕이 지하 창문과 맞닿아 있는 화단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낑낑거리는 소리를 낸 후 부드러운 흙더미 위로 엉덩이를 바짝 내렸다. 김정민이 콕의 몸을 가려 자세히 볼 수 없었다. 김정민이 뒤처리를 했다. 곧이어 콕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콕과 김정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따라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화단에 콕이 남긴 자국을 운동화로 쓸어 없앴다.


선숙 님과 나는 성격이 잘 맞았다. 선숙 님 덕분에 배드민턴 실력이 전보다 늘었고 약간의 자신감도 생겼다. 김정민도 여전히 경호수와 함께였다. 경호수가 발산하는 에너지에 끌려다니다 보니 한숨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김정민의 팀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여자들과 남자들이 한 조로 경기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불가피한 날이었다. 김정민과 경호수, 선숙 님과 나는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김정민은 여전히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김정민이 뒤에 서고 경호수는 앞에 나와 있었고 선숙 님과 나는 나란히 섰다. 토스로 정해진 순서대로 선숙 님의 서브로 시작해 순식간에 3세트가 끝났다. 경기가 끝난 후 선숙 님과 경호수가 맥주 한잔을 권했고 어쩔 수 없이 나와 김정민이 수락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들러리로 따라가는 것이 뻔한 상황을 수락해 버린 김정민이 의아하다고 생각됐다. 예상대로 선숙 님과 경호수가 한자리에 붙어 앉았다. 한 팀씩 가림막이 있는 절약한 자리배치라 한 자리에 앉는다면 몸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김정민의 어깨가 닿았다. 경호수가 주문을 맡았다. 꼬치와 탕을 안주로 맥주 3병만 마시고 일어나자 약속했던 자리가 소주와 맥주가 섞이고 상을 몇 번 치워 새로운 안주로 다시 세팅이 되고 해가 지고 난 다음에야 끝이 났다. 예상했던 결말대로 경호수와 선숙 님은 몸이 거의 밀착되어 나갈 때는 한 몸처럼 붙어있었다. 선숙 님과 경호수가 어딘가로 사라지고 김정민과 나도 비틀거리며 다음 행선지를 결정하기 위해 서있었다. 김정민이 담배를 권해 골목으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각자 몇 모금을 들이켜고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김정민과 입을 맞추었다. 술이 그렇게 만들었다.


배드민턴 연습을 마치고 정민의 집에 가서 샤워 후 콕을 산책시키는 일이 그날의 일과가 되었다. 집요하게 화단에 올라가려는 콕과 끝내 내려오게 하는 나를 보며 김정민은 깊은 한숨을 끌어올리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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